세 자매가 어릴 때는 세발자전거나 보조 바퀴가 달린 네발자전거는 없었다. 아버지의 크고 무거운 ‘자전차’가 한 대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불렀다. 안장 앞, 뒤로 한 명씩 태우면 최대 세 명까지 탈 수 있다. 사람 대신 짐도 제법 많이 실을 수 있으니 차가 귀하던 70년대에 차 노릇을 한 건 맞다.
아버지 앞에는 작은 여동생이, 나는 아버지 뒤에 타고 보건소에 예방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주사 맞는 것도 두려웠지만, 커다란 아버지 등 뒤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다 보면 자전거가 비틀거리는데, 자전거와 함께 넘어질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남동생들이 예닐곱 살이 되자 우리 집에도 세발자전거가 생겼다. 하지만 훌쩍 커버린 자매에게 세발자전거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엄마가 자전거를 샀다. 핸들 앞에 하얀 바구니가 달린 예쁜 자전거였다. 아버지 자전차처럼 높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는 엄마가 부러웠다.
하루는 마당에 서 있는 엄마의 자전거를 무작정 끌고 나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안장 위에 엉덩이를 가까스로 올려놓고 구르려는 찰나 나동그라졌다. 그러기를 몇 번 무릎에서 피가 났다. 무릎보다 엄마의 새 자전거가 망가질까 봐 걱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깨진 무릎을 보며 엄마가 화낼 줄 알았는데 다음 날 같이 운동장에 가서 연습하자고 했다.
엄마가 뒤에서 붙잡아 주니 균형이 잡혀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반 바퀴를 돌다가 드디어 한 바퀴를 혼자 돌게 되었을 때, 어깨에 날개 한 쌍이 생긴 기분이었다.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뛸 때보다 더 빠르다니 하늘 위로 붕 뜰 것만 같았다. 자전거 바퀴 두 개는 작은 날개가 되었다.
우리 동네 좁은 골목길에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 좀 더 멀리 가보고 싶었다.
“엄마, 나 자전거 타고 할머니 가게까지 가볼래.”
엄마 심부름으로 걸어서 몇 번 갔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낯선 골목길도 지나야 했고, 때로는 무서운 개를 만나 먼 길로 돌아가느라 험난한 여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자전거만 있다면 큰 개가 나타나도 내가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처음 가게에 간 날, 할머니는 대견하다며 찐빵을 사 주셨다. 그 후로 나는 할머니와 엄마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음식이 상할까 아침에 도시락을 못 싸가는 여름에는 엄마가 점심때마다 할머니 도시락을 날라야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게 되자 여름방학 동안 도시락 배달은 내 몫이 되었다.
5일 장이 서는 날에는 엄마가 당근이나 애호박, 감자를숭숭 썰어 넣고 뜨거운 칼국수를 만들었다. 장날에는 단골손님이 많았다. 반찬 걱정 없이 손님들까지 함께 드실 수 있도록 넉넉하게 칼국수를 끓인 것이다. 뜨거운 국물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조심 자전거를 몰아 가게에 도착하면 할머니뿐만 아니라 손님들까지 칭찬했다. 그 맛에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굴렀던가보다.
그 시절 내게 가장 많은 찬사를 보낸 사람은 엄마도, 할머니도 아니었다. 우리 가게 맞은편에 있는 아이들 옷가게 아줌마였다. 웃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얌전한 아주머니는 내가 할머니 한복 가게에 갈 때마다 다가오셔서 ‘예쁘다, 착하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아줌마 가게에 아줌마는 없고 남자아이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줌마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얼굴을 보니 나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오빠였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은 저 오빠가 천사 아줌마 아들이라니.’ 그 순간부터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빠랑 눈이 마주칠까봐 부끄러웠다. 아줌마가 내게 그랬듯이 할머니는 ‘싹싹하다, 착하다’하며 계속 오빠 칭찬을 했다.
날개를 타고 가게에 갈 때마다 오빠랑 자꾸 마주쳤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큰 눈이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 혼자 가게를 지키는 내 앞에 커다란 딱지 하나를 홱 던져 놓고 오빠는 자기네 가게로 쏙 들어갔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딱지는 만지지도 못한 채 화장실에서 돌아온 할머니를 보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로 오빠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가 되었다. 길고 지루했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빛을 비추던 마음속 등대였다. 엄마의 자전거가 없었다면 나는 우리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가슴 설레던 짝사랑도 없었겠지. 나중에 나는 그 딱지가 오빠의 러브레터였을지도 모른다며 가져와 펼쳐보지 않은 걸 두고 두고 후회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한 달간 백수로 지냈다. 겨울 방학까지 합치면 석 달째 취업이 되지 않아 애가 탔다. 들어가고 싶은 곳에서는 연락이 없고, 오라고 하는 곳은 가기 싫었다. 벚꽃이 필 무렵, 더는 염치가 없어 학습지 회사에 들어갔다. 남원에 있는 호텔로 신입사원 연수를 가서 동기들을 만나고 조금 우울했던 마음이 풀렸다.
연수에서 돌아와 근무 지역을 배정받았는데 어이가 없었다. 연고지 발령으로 기껏 떠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연수까지 다녀온 마당에 그만둘 수도, 따로 갈 데도 없었다.
90년대 중반, 우리 고향에는 아파트나 빌라가 많지 않았다. 단독 주택에 사는 회원 20~30 명을 하루에 다 만나려면 발바닥이 뜨겁게 뛰어다녀야 했다. 굶어도 안 빠지던 살이 쑥쑥 빠졌다. 봄볕에 얼굴도 까맣게 탔다. 그런 딸이 좀 안쓰러웠나 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 위로 쓰러지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너 월급 타면 반씩 부담해서 스쿠터 한 대 사까?”
“스쿠터? 내가 오토바이를 어떻게 타?”
“50cc라서 면허도 필요 없구 자전거 탈 줄 알면 금방 탈 수 있다는디”
엄마의 쌈짓돈과 내 월급을 쪼개 80만 원짜리 빨간색 스쿠터를 장만했다. 우리는 옛날처럼 운동장에 나가 자전거 대신 스쿠터를 연습했다. 엄마 말이 맞았다. 50cc 스쿠터는 자전거보다 쉬웠다. 게다가 그 속도는 자전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엄마가 새로 달아준 빨간 날개를 타고 출근을 했다.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에 사는 회원을 만나러 갈 때는 제법 폭주족 흉내를 내며 속도를 올렸다.
문제는 있었다. 빨간 스쿠터를 몰고 읍내로 들어오면, 그 날이 하필 장날이라면 나는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맞아야 했다. 인삼가공식품 생산으로 경기가 좋았던 당시 고향의 스쿠터족은 다방에서 일하는 예쁜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커피를 배달하는 언니들과 다르게 단발머리에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스쿠터를 타는 내가 좀 이상해 보였을 거다.
문제는 일주일 만에 없어졌다. 주차장 한쪽에 모셔 둔 우리의 빨간 날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고리 모양 자물쇠는 뎅강 잘린 채로 뱀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 이웃들에게 물어보니 훔친 사람들은 금방 팔아버리니까 찾기 힘들다고 했다. 허무했다. 내 땀과 엄마의 쌈짓돈이 7일 만에 증발하다니 억울했다.
빨간 날개를 잃은 나는 남은 월급으로 자동차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엄마가 달아준 날개 한 쌍보다 더 크고 튼튼한 날개 두 쌍을 달아보리라 마음먹었다. ‘두 바퀴로 가는 스쿠터보다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으로 날게 할 거야’ 나를 위로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5년 뒤, 신혼 보금자리가 있던 경기도 연천에서 내 고향 충청도까지 고속도로 위를 날아다녔다. 스스로 달아준 두 쌍의 날개를 타고 속초, 여수, 부산도 누볐다. 지금은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푸른 바다 위를 날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