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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Nov 07. 2020

'현실적'이라는 불편한 진실

아빠 난 공부를 더 못해

'현실적'이라는 불편한 진실

올해 중순 때인가, 가족들끼리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술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여러 대화 주제들 중 한 순간 열띤 토론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현실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깊고 열정적이게 대화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유별나게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오빠가 부모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게 뭔데?


우리 가족은 무척 평범한 집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꾸준히 맞벌이를 하셨고, 그리 잘 살지도 (어쩌면 형편이 여의치 않은 쪽에 속하는) 않았다. 오빠는 우리 삼 남매 중에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린다거나 요리를 하고, 작은 모델을 꿈꾼 적도 있었으며 디자이너가 장래희망일 때도 있었다. 나나 오빠나 서로는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인 탓에 엄마, 아빠도 이런 잠깐 스쳐갔던 꿈들 조차도 다 알고 계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그래~알아서 해봐라~' 주의였고, 아빠는 '그걸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해야 하는 건데?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고 네가 어떤 부분에서 그걸 잘할 수 있는데?' 등 깊은 고민을 해주시면서 그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과 재능의 증거 확인을 필요로 하셨다. 워낙 '아빠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고, 좋은 대학 졸업까지 했으며, 공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우리도 모르게 박힌 인식이 그런 아빠의 질문 앞에서 입이 꾹 닫히게 했다. 그래서 항상 엄마와 단둘이 있을 때나 말하게 되었고, 아빠는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지속적으로 설교하셨다. 예체능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싶다는 내색을 조금이라도 하는 날엔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냐는 되물음 뿐이셨다. (참고로 우리 아빠는 가부장적이지도 않으셨고 자상한 성격에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노력하는 분이셨다. 다만, 본인의 가치관에 고집이 있으셨고, 교육관이 뚜렷하셨으며 표현이 서투신 것뿐이다.)


이번 열띤 토론에 오빠뿐 아니라 나까지도(동생은 우리와는 성향이 다르다.) 이러한 어린날의 아빠의 말씀과 모습까지 회상하게 되었다. 오빠가 먼저 아빠는 꼭 현실적인 길을 가라고 했다면서 운을 띄웠다. 그에 아빠는 재능이 있어 보이면 찬성을 하고 밀어주었을 텐데 그냥 한 순간 꽂혀서 도전해보겠다고 하니 그랬던 거라고 대응하셨다. 그 말을 들은 오빠 왈,


"만약에 아빤 내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다면 좋다고 했을 거야."


그렇다. 나는 한때 주얼리 디자이너를 꿈꾸기도 했고,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도 했었다. 반면 외교관이 되어 UN 사무총장 반기문 님을 뒷따라가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디자이너나 요리사를 꿈꿀 땐 '그건 잘 알아봐야 해, 성공하기 힘들어, 현실적으로 잘 생각해봐야 해'라고 하셨지만 외교관일 때는 열심히 해보라며 친척들이나 지인들 앞에서조차 그 장래희망을 자랑하듯 흐뭇해하며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때의 내 성적은 중상, 하를 왔다 갔다 하는 아주 어정쩡한 등수였다. 그래서 오빠의 한 마디가 너무 이해되었다.


현실적: 실현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현실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보자면 아빠가 말하는 '현실적'이라는 뜻에 합당하다. 현재 실제로 존재 혹은 실현될 수 있는 것. 이루어질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아무 재능이 보이지 않는데 그걸 응원해줄 수는 없다, 현실적이지 않으니까.라고 하셨던 아빠 말씀이 백번 옳다.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것일 뿐 아빠의 주관에서 우리에게 바라셨던 '현실적'인 것들은 어찌 보면 가장 비현실적인 것들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좋아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빠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현실적이라는 건 사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고 싶다면 최대한 열심히 그 길을 걸으면서 만들어가는 거 아니야? 조금은 동떨어져 보이는 삶이라도 본인이 연습하고,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가면 결국엔 실현하는 것에 가까워지는 거니까 그땐 현실적이여지는 거잖아."


아빠는 조금 어렵다고 답하셨지만 난 이 대화 덕분에 고민을 좀 더 하게 되었고, 오히려 힘까지 얻게 된 것 같다. 오빠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화제를 꺼내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깨달음이 되었다. (어쩌면 아빠가 그 당시 현실적이라는 것에 공부만을 고집하셨던 건 다른 분야를 마음껏 지지해줄 형편이 되지 않기에 우회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이해된다.)


vivid dream: 최선을 다해 꿈꾸는 것


주변까지도 아니고 나 하나만 잘 봐도 현실적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정해지지 않은 마지노선을 두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선뜻 나아가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취업을 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 상사에게 몇 차례 질문을 하다가 일도 많은데 성가시게 한 벌로 따끔한 충고를 듣게 되었다.


"자연재해가 아니고서는 모든 일은 본인이 다 알아서 할 수 있어, 한 번씩 더 알아보고 스스로 결정해봐."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3년 전쯤인데 서운해서가 아니라 일하면서, 그냥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공감하고 있는 말이기에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는 어떠한 일을 해결하는 데에서만 해당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공부하며 훈련하고 갈고닦으면 결국엔 실현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다. 패션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패션 디렉터를 뒤늦은 나이에 꿈꾸고 있는 나로써는 굉장히 힘이 되는 믿음이다. 단순히 글쓰기를 좋아해 혼자 여러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고, '언젠간 책 한 권 내 이름을 걸고 내봐야지' 하는 바람을 좀 더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꾸준히 패션 공부를 하고, 준비하여 브랜드 런칭에 성공하는걸 현실적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vivid dream이라는 말은 생생하게 꿈꾸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도 그 말을 굳게 믿고 있는 1인으로써 이 말이 심플하게 '꿈대로 이루어지리라!'라는 말이 아니란 걸 잘 안다. 철저한 준비과정과 실현하기까지의 절차를 밟으며 생생하게 노력을 한다면 꼭 이룰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직접 그 말을 증명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현실적인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뭐든 본인이 하고자 하는 대로 차곡차곡 경험과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뭐든 이루어낼 수 있는 지니 램프를 가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조금 늦을지라도 이루어낼 것이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현실적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현혹되지도 말고 당장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현실적이란 말에서 도망가 가가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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