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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Oct 24. 2020

엄마는 수식어 부자

어떤 존재라 해야 할까

엄마는 수식어 부자
어떤 존재라 해야 할까

몰라줘서 미안해

사실 오늘 발행하려 했던 글이 있었다. 나의 첫 이야기를 정신없이 써 놓고는 불금을 보낸 후 마지막 체크를 하고 업로드할 예정이었는데, 새벽이 되니 마음이 몽글몽글한 게 글로라도 풀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최근에 '나는 앞으로 어떤 걸 해서 어떻게 성공할 거야!' 이런 생각만 하기 바빴다. 하루가 망가진 것 같은 때에는 남들과 비교하여 뒤쳐지는 것 같아 한숨만 나왔고,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는 날에는 왠지 자신감이 붙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에 관련해 몇 날 며칠을 푹 빠져 살곤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거리도 온통 그런 것들로 이어간다.


홀로서기를 한 뒤에 엄마는 줄곧 나의 콜 메이트가 되었다. 보통 어떤 하나의 주제만으로 이어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화제가 훅훅 넘어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대화에도 나의 다짐과 계획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나는 힘차게 말하면 엄마는 격려를 해주고, 마무리는 '내가 호강시켜줄게, 걱정 마!'


오늘 낮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는 퇴근 때 아니면 연락이 잘 없는 편이기 때문에 왠지 느낌이 서늘했다. 그래도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넘겼던 첫 번째 통화, 남긴 부재중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병원에서 뇌 사진을 찍어봤는데 혈관이 부어 있었다는 거였다. 검사에서 힘든 과정이 있었어서 진료비를 내려 카드를 긁을 때는 손까지 덜덜 떨렸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나마 일찍 발견한 거여서 큰 일까진 아니라고는 하지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놀란 마음에 나도 엄마한테 연락을 해봤다. 집에 걸어가는 중이라며 작아진 목소리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겁에 질려 있다가 이따금 허무함과 두려움을 느끼며 왈칵 쏟아진 눈물에 흐느끼는 엄마의 음성이 들려와 더욱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내 눈 앞에서 영상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게 다 느껴지는 듯했다. 나도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그래도 다행인 거야, 천운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주에 다시 검사받아보자!"라고 토닥였다. 일주일 뒤쯤에 재검사를 받아서 약물로 치료가 가능한지, 수술해야 하는 건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했기에 그것도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 하고는 있지만, 괜찮다고는 하지만, 내가 엄마였다면 전혀 괜찮지도, 다행이라 생각되지도 않을걸 알기에 뜨끔하는 가슴은 말을 자꾸 멈칫하게 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나와 통화를 하면서 엄만 계속 아파했다. 엄청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50대 중반이 된 상태에서 작년에는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하셨고, 30년 가까이를 꾸준히 고된 일로 채워오시다가 이제야 쉬려니까 자잘하게 지속적으로 아팠어서 하루의 반을 병원 다니는 데에 쓰게 되었다. 그런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터. 전화를 하면서는 아픈 얘기만 하게 되니 말도 뚝뚝 끊기고, 서로 할 말은 오늘의 건강 안부, 그에 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 와중에 난 엄마에게 나의 할 일들을 틈틈이 떠들고 있었고, 엄만 그걸 또 격려해주는 말들로 답해주었다.


낮에 엄마 진료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덜컹이는 마음을 부여잡고,

'내가 그동안 뭘 한 거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머리가 지끈이고, 목 뒤가 아프며 몸이 이곳저곳 고장 난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너무 염려를 해서 오히려 스트레스 때문에 더 아픈 건 아닌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엄마를 대했던 것 같아 미안했다.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싶어도 떨어져 있으니까 라는 핑계로 엄마의 몸상태까지 내 멋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몰라줘서 미안해, 엄마.


정말 열심히 살아야지

우리 집은 아빠, 엄마, 오빠,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다. 어렸을 적부터 둘째인 나는 셋 중에서 홀로서기를 가장 잘한다고 자부했다. 아무래도 샌드위치에 낀 여러 속재료들 중에 그나마 입맛에 돋보이려면 햄이나 치즈처럼 묵직해야 하기에 유별나게 효녀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는 엄마한테 나만한 친구는 없다는 자만(?)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새벽 3~4시가 다 되도록 수다 떨다 지쳐 잠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소한 것들로 말다툼이 심각하게 나기도 했다. 그래서 나름 나와 엄마는 '단짝'이라는 생각도 했다.


서울로 취업을 하고 26년 만에 처음으로 독립을 하던 날, 엄마는 나를 두고 가면서 터미널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냥 또르르 흘린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주룩 흘려보냈다. 나도 그런 모습을 보고 울컥하다가 마저 버스 태워 보내드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가 그새 보고 싶어 져서가 아니라 그 날 교육받으러 가 있는 동안 후줄근했던 내 자취방을 구석구석 치워놓고 필요한 것들을 싹 다 채워둔 걸 보고는 꺼이꺼이 소리를 내면서 울어버렸다.


취업을 하고 혼자 살면서 힘들었던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기분 좋았던 날들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힘겨웠다. 그냥 집에 다시 돌아간다고 할까, 짐 싸서 가버릴까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럴 때면 처음 엄마를 터미널에서 보냈던 그 순간을 되내었다. 그러고는 '얼른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날 붙잡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잘 적응해서 혼자인 시간이 즐거울 때도 많지만 그땐 정말 모든 게 어렵고 괴롭기까지 했다. 인턴으로 들어갔기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전전긍긍할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돈을 조금씩 보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게 미안하고 마음이 안 좋았는데 나중에는 '아싸' 할 때도 있었다. 어쩜 이리 엄마한테 받는 것들에는 금방 적응이 되던지. 그래도 '난 성공해서 엄마 호강시켜줄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괜찮다 합리화했던 것 같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여전히 엄마한테 나는 '조금만 기다려 꼭 호강시켜줄게!'라는 말을 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구나.


정말 열심히 살아야지.


어떤 존재라 해야 할까
동생, 나, 엄마 우리 셋은 단짝

모든 관계에는 이름이 있다. 형식적인 호칭과 그 이름들로 유지가 된다. 근데 그런 거 말고, 진짜 나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문득 생각해 보았다. 유일무이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고마운 사람, 미안한 사람, 잘해드리고 싶은 사람, 나의 원동력, 가장 닮은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흠. 여러 가지를 헤아려 보아도 단정 지을 수 있는 수식어가 없다. 어쩔 때는 나보다 더 동생같이 철없어 보일 때도 있어 '아직도 울 엄마는 애기야 애기~' 이러지만 어쩔 때는 내가 아무리 어른처럼, 대단하고 멋진 사람처럼 굴어보고 싶어도 엄마의 마음을 따라갈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라는 두 글자가 가슴을 조이게도 하고, 뭉클하면서 울컥하게도 한다. 또 나의 자존감이 되기도 하며 세상 든든하기도 하다. 편안하기도 하면서 가장 불편하게도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엄마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부분들이 상당하게 차지한다는 기분이 들 때.)


거듭 생각해 보니 굳이 어떤 존재인지 결정해 말해보자면,

신기한 사람.


자연스럽게 힘들면 생각나는 사람이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며,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되었다가도,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이 복합적이고 묘하면서 가슴 벅찬 감정을 이끌어내는 사람. 우리 삼 남매를 당신이 힘내야 하고 버텨야 하는 근거로 삼은 사람. 그래서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잘 살아가는 게 엄마에게는 더 바랄 것 없는 것이 되겠지만, 다시 한번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루다. 역시 통화 끝머리엔 나만의 루틴처럼 "사랑해, 엄만 건강만 챙겨. 내가 호강시켜줄게!"


사랑해, 온 힘을 다해. 아프지 마-!



근데, 엄마한텐 내가 어떤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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