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19990619
본 게시글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이며, 해당 동영상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겨울이 왔다.
거리는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고,
노점에서는 붕어빵 굽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누군가의 손을 쥐고 걷는 연인들.
누군가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오래된 사랑을 정리할 생각을 했다.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윤재는 멈춰 서 있었다.
작년 겨울
윤재는 떠났고,
소희는 남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신호등이 깜빡였다.
멀리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보였다.
어두운 도로 위 조명이 비추는 신호등 아래에서 소희가 서 있었다.
손끝이 시려웠는지 긴 소매 속으로 손을 숨겼다.
윤재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봤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희는 잠시 발을 멈췄다.
차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고
소희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장면을 본 윤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어느 겨울
어느 길 위.
동생이 손을 내밀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차가운 손.
붙잡지 못한 손.
사람들 사이로 소희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그냥 바라만 봐야 할까.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놓아야 할까.
그때와 똑같이
이번에도 그냥.
눈앞에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둬야 할까.
윤재는 신호를 기다릴 새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흔들었다.
발밑에서 녹아가는 눈이 미끄럽게 스쳤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리게 흘러갔다.
소희의 손이 보였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윤재는 조용히 되뇌었다.
신호가 바뀌고 소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윤재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그녀를 놓쳤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또 그냥 지나쳐버린 것.
이번에도 그러고 말 것인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윤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숨이 멈췄다.
[소희]
그녀의 이름이 화면 위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윤재는 몇 초간 망설였다.
받아야 할까.
소희는 왜 전화를 건 걸까.
그러나 고민할 틈도 없이 손가락이 화면을 스쳤다.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윤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희야."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기 가득한 숨소리만이 조용히 전해졌다.
소희도 이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걸고야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윤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몇 초의 침묵. 그리고 문이 열렸다.
창백한 얼굴.
뜨겁게 달아오른 볼.
헝클어진 머리.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먼저,
윤재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소희의 눈물이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소희는 문을 연 채로,
윤재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그대로 주저앉듯 윤재의 품에 안겼다.
윤재는 본능적으로 소희를 받아 안았다.
흐느낌이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소희의 손이 윤재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고 서 있었다.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윤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날 밤.
소희는 지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지운이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
익숙한 목소리.
예전보다 낮고 차분한 톤이었다.
소희는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했다.
"지운 씨… 미안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운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듯
조용히 웃었다.
"그 말, 이제야 하네."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이 너무 따뜻해서,
소희는 오히려 더 미안했다.
"제가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소희 씨가 선수 쳤네요."
지운이 민망한듯 가볍게 말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소희 씨도, 나도."
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지운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전화가 끊겼다.
소희는 한참 동안
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지운은 조용한 공원에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눈이 덮은 벤치.
지운은 천천히 걸어가더니
그대로 눈밭 위에 누웠다.
차가운 감촉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눈을 감으면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운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등 불빛
그 사이를 떠도는 눈송이들.
소희가 말했다.
"지운 씨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을 감았다.
그 말이 울렸다.
행복.
그 단어가 그에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사실 지운은 소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희가 원하던 눈이 온다고.
왜인지 모르지만 기다리던 눈이 내리니까
창문을 열어보라고.
그 말을 꼭 전하고 싶던 지운은
눈밭에 누워 오랜만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린 첫눈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어
하얗게 뒤덮인 세상을 보고 싶은데
언제쯤이면 볼 수 있는 걸까
내 사랑아 지금 창밖을 바라봐
네가 좋아하는 눈이 많이 내리고 있잖아
자기야 오늘만큼은 행복하자
나쁜 생각 그만하자
어서 내 품에 안겨봐
야 우리 힘겨운 날들이 찾아와도
행복했던 날들 생각하며 웃자
오늘만큼은 행복하자
나쁜 생각 그만하자
어서 내 품에 안겨봐
- 첫눈, 19990619
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