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않는 겨울에 머물다

♪눈, 새소년

by 섣달

제8화. 녹지않는 겨울에 머물다


본 게시글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이며, 해당 동영상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 새소년


소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벽지에 반사된 겨울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기척도, 소리도, 온기도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머리가 무겁진 않았다.
며칠 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열이 사그라진 듯했다.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던 묵직한 통증도 옅어져 있었다.

감기는 거의 다 나았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가슴 어딘가는 여전히 이상하게 저릿했다.
오히려 체온이 정상이 되어버리자, 더 명확히 느껴졌다.
이 고요 속의 허전함이.




소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방 안을 채운 유일한 소리였다.
책상 위에는 감기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식어버린 찻잔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윤재가 머물렀던 흔적들.




윤재는 분명 이 방 안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사람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그리고 말없이 사라졌다.




소희는 찻잔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입술에 가져가 보았지만 이미 미지근한 그 맛은
아무런 위로도 주지 않았다.



그조차 윤재 같았다.
처음엔 따뜻했지만

결국 식고 남은 잔열뿐인 것처럼.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방 안이 서서히 겨울로 물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겁지도, 거칠지도 않은 눈이었다.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땅 위에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마치 말 한 마디 없이 떠난 사람처럼

하얗고 말갛게 세상을 덮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
소희는 문득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윤재가 떠나던 그해 겨울 그는 말했다.




"눈이 완전히 녹기 전에 보자."





처음엔 그 말이 약속처럼 느껴졌었다.
다시 눈이 내릴 계절이 오면
윤재도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게 윤재가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소희는 안다.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미리 쓰인 작별인사였다는 걸.

애초에 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거리 끝에 사람 하나가 보였다.




하얗게 덮인 인도 위에 검은 그림자가 얹혀 있었다.
소희는 얼어붙은 채 그 형체를 바라보았다.

윤재였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눈송이를 한 발씩 밟아가며.
어디에도 허둥댐 없는 걸음.
도망치듯 떠났던 사람의
너무나 조용하고 단단한 귀환이었다.




그 순간, 소희의 가슴 안쪽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지 말지.





그토록 바랐던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왜 이토록 두려운지.

윤재는 거리를 건너왔다.
정확히, 그녀의 앞까지.




“괜찮아졌어?”





목소리는 작았고

그 안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소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은 다 나았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낫지 않은 채였다.




윤재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소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윤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소희는 알아차렸다.
자신이 윤재를 밀어내고 있다는 걸.

윤재는 한때 소희에게 전부였다.




하지만 동시에, 전부를 앗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소희는 자신이 꼭 녹지 않는 겨울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계절은 흘렀고, 사람들은 바뀌었고
하늘도, 거리도 모두 제자리를 찾았는데
소희 혼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윤재는 돌아왔다.
소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엔
변해버린 마음이라는 거대한 틈이 놓여 있었다.





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래서 두려웠다.

다시 사랑하게 되면
윤재가 떠났던 그 날보다 더 아프게 될까 봐.





지금 밀어내지 않으면
다시 무너지게 될까 봐.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려 줘.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나를 기다려 줘.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윤재를 품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진심이었고
그것마저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게 더 잔인했다.





윤재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실망도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평온함이었다.

소희는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은
올해도 역시 봄을 외면하고 있었다.




소희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윤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말보다 긴 침묵이
체온보다 더 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윤재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소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소희의 창문 아래엔 발자국 하나가 매일같이 남았다.

소희는 여전히 겨울 안에 머물렀고,
윤재는 그 바깥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랑, 나는 멀리 이곳에

돌아가지 않아

우스운 말이지만

자 여기 소란스러운 내 맘

사랑, 나는 아직 어둠

가여이 여기어주오

미안한 말이지만

저기서 잠시 기다려줄래요

어디로 숨어볼까

나는 꼭 겨울 같아

하얗고 차가웁게

너의 마음을 보네

어디로 도망갈까

나는 꼭 겨울 같아

하얗고 차가웁게

너의 마음을 보네

사랑

내 마음 흰 눈 같이

네가 지나간 걸음 걸음

찍힌 발자국 여기에

여기에 깊게

겨울은 또 봄을 외면해 버린

너무 많이 쌓인 눈

어디로 숨어볼까

나는 꼭 겨울 같아

하얗고 차가웁게

너의 마음을 보네

어디로 도망갈까

나는 꼭 겨울 같아

하얗고 차가웁게

너의 마음을 보네

사랑

- 눈, 새소년


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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