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LUCY
본 게시글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이며, 해당 동영상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 채
아침을 맞았다.
머리를 드니 창밖으로 겨울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방 안엔 묵은 공기 대신 익숙한 향이 감돌고 있었다.
유자차.
소희가 자주 마시던, 감기 기운이 돌 때면 꼭 끓여 마시던 그 향.
탁자 위에는 반쯤 비워진 잔이 놓여 있었다.
어설프게 따라놓은 유자차.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
그 속에는 따라 해보려 애쓴 윤재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잔을 들어 입술에 댔지만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소희 없이 흘러가는 하루처럼
공허했다.
요즘 윤재는 소희의 하루를 흉내 내고 있었다.
아침이면 커튼을 젖히고
소희가 좋아했던 시집을 펼쳤다.
책갈피 사이에는 소희가 줄 그어둔 문장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계절이었지만
잠시 같은 하늘 아래 머물렀다.”
그 시를 처음 읽는 순간
윤재는 그것이 소희의 마음이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닿지 못했던 계절
머무를 수 없었던 마음.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었던 어떤 날들.
이제야 알았다.
소희는 ‘함께’보다 ‘끝’을 먼저 걱정했던 자신의 손끝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를.
소희의 집에 다녀온 다음 날
윤재는 조심스레 책상 위를 정리하다
소희가 흘린 듯한 작은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
구겨지고 찢긴.
반쯤 적힌 쪽지였다.
“윤재야,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나도 그게 두려워.”
문장은 다 쓰이지 않았다.
마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숨겨버린 필체.
윤재는 그 쪽지를 손바닥에 올려둔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전해지지 못한 감정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진심이었다.
그날 저녁
윤재는 그들이 자주 찾던 카페 앞을 서성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낯익었지만
그곳엔 더 이상 소희는 없었다.
자리를 바꿔 앉은 세상이 낯설었다.
과거를 좇는 발걸음은
이제 현실로 이어져야 했다.
소희가 있는 곳은
이전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서늘한 공기가 폐를 타고 돌았다.
윤재는 아무 말 없이 소희의 집 근처를 걸었다.
창을 올려다보면
그 안에 여전히 그녀가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불쑥 찾아가도 될까.
윤재는 그렇게 발걸음을 멈추려던 순간이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떨렸다.
‘소희’
그 이름 세 글자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
윤재는 얼어붙은 손끝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지듯, 떼쓰듯.
“나 아파. 윤재야.”
그 한 문장이
윤재 안의 모든 판단을 무너뜨렸다.
문 앞에 섰을 때
손끝이 떨렸다.
예전 같았다면,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소희가 문을 열었다.
말도 없이 윤재를 껴안았다.
그 품 안에서 소희는 주저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너머로
깊고 오래된 그리움이 흘러나왔다.
윤재는 말없이 소희를 감쌌다.
말보다 온기가 더 진하게 닿는 밤이었다.
소희는 윤재의 손에 이마를 맡긴 채 잠이 들었다.
소희의 숨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속엔 아직 끝내지 못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윤재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밤사이 내린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낡은 테이프처럼 잊히는 게 아니라면
그 뒤를… 이제 이어 써도 되는 걸까.’
윤재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고된 하루 끝에서도 미소 짓게 했던 소희의 얼굴을
윤재는 단 한 번도 지운 적 없었다.
기억 하나로 버틴 시간들이 있었다.
그 기억이 지금, 현실이 되어주었다.
사랑은 돌아왔다.
그러나 그 사랑을 다시 믿기까지엔
시간이 필요했다.
윤재는 그 시간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겨울 한복판
두 사람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녹지 않은 채, 그러나 멈추지 않은 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기나긴 시간 쭉 함께하자고
하루하루를 함께 그려냈지
영원할 것처럼
고된 하루도 힘들진 않았어
네가 웃으면 다 괜찮아져서
매일 그날의 장면을 되감아
여기 나 홀로 남아
영화 속에 열린 결말처럼
영원할 순 없나 봐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 걸까
난 여기 있는데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널 사랑한 시간마저
낡은 테이프처럼
바래져 잊혀지는 거 그것만은 싫어
가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것
너와 약속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아득히
이젠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점점 멀어져 가
못다 한 말들이 너무 많아
쉽게 널 못 잊나 봐
텅 빈 거리에서마저 너가 보여
가슴이 아려와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널 사랑한 시간마저
낡은 테이프처럼
점점 잊혀져가는데
너가 없는 내 삶엔
아무런 내용도 없는데
이대로 난
멈춰버린 시간
우리의 이야기
여기서 끝이라곤 생각하기 싫어
그 뒤를 이어 보려 해
같은 맘이라면
긴 여행을 다 끝난 뒤에 봐
예전처럼 문을 열고 달려와서
내 품에 안긴 채로 꼭 말해줘
“다녀왔어”
-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LUCY
1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