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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영 Aug 16. 2021

마가린이 잘못했네...


엊그제 생맥 두 잔에 널브러졌던 일은 치욕이었다. 며칠 정신줄 놓고 놀았더니 정신줄을 벌레가 갉았던 건지 그만 어질어질 칭얼칭얼 부들부들 그랬다. 함께 마신 칭구는 시민단체에서 만난 사인데, 어느덧 이십여 년 세월이 지났다.

오래된 칭구와의 대화는 지난 일화가 안주거리인 법. 술 처먹다가 물 빼러간 화장실에서 앞 지퍼를 내리면서 노래한 죄로, 옆에서 물 뺌을 마악 끝낸 대학생에게 두들겨 맞았던 일은 늘 빠지지 않는 일화다.

술 마시다 말고 예닐곱이던 우리 일행 모두가 남자 화장실 앞으로 몰려갔다. 취하기도 했겠다 구경도 났겠다.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누구야? 누가 때렸어? 쟤들 학생이야?”


“야! 우리는 다 졸업해써!(이십대 중후반) 어린 것들이 꺄~부네!”


“저거뜰 짭새 아냐? 경찰 불러!”


여자들은 남자 화장실에 들어서지 못하고 고함과 비명만 질러댔는데, 압권은 이거였다.


“아니, 왜 오줌 싸는데 때려? 엉? 오줌은 싸게 해줘야지! 어엉? 오줌이 죄야?”


폭력을 행사했던 학생은 이렇게 진술했다. 너무 술에 취했다고. 그런데 옆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더라고. 게다가 정말 못 부르더라고. 너어무 듣기 싫었다고. 모두가 술에 취해서라고.


어찌됐든 합의는 이루어졌다. 박살난 안경 값과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다. 싸구려 안경을 맞추고 칭구는 자리를 마련했다. 남은 돈으로 술을 마시자는 거였다. 현장에 있었던 우리가 다시 모였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그날의 무용담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고, 피를 나눈 진짜 동지가 된 기분에 뭉클했으며 사건의 발단이 된 민중가요의 앞날을 우려했고, 앞으로 오줌 쌀 때는 민중가요를 조심하자고 다짐했다. 그날따라 감자탕집 할머니는 살집이 두둑한 뼈다귀 공수를 아끼지 않았고 누군가의 기타 연주에 우리는 목청을 놓아 노래했다. 추레한 술집 골목엔 어둠이 언뜻언뜻 기척을 냈고 어느 틈엔가 감자탕집 유리문 앞에 똬리를 틀었다. 화장실에서 끝내지 못했던 민중가요와 못다한 오줌발이 유리문 틈새를 빠져나가 스르르 어둠으로 스몄다.


 얼마 전 친구는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집 근처였다. 지난 겨울에 우리집에서 새벽까지 퍼마신 이후 몇 개월만이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이야. 예전같았으면 도망치고 말았을 거야.“


새벽 두 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일하기도 한다며 친구가 말했다.


나는 친구를 위로해주려고 골뱅이와 쥐포를 안주로 주문했다. 쥐포 소스로 마요네즈가 나왔다. 그때 마가린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가린이다.


“기억나? 너희 엄마가 사오셨다던 그 위인전 전집 말야.”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아이들은 책을 좋아했다. 어느날인가 친구의 엄마가 위인전 전집을 사들고 왔다. 길거리 리어카 위에 늘어놓은 책이었다. 카바이트 조명 밑에 진열돼 있던 그것들은 대부분 불량품이었다. 겉장의 인쇄가 뒤집혔거나 속지가 드문드문 빠져 있었고, 한 챕터가 뭉텅이로 빠져 나간 책도 있었다. 그러나 책에 굶주린 친구에겐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선물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였던 친구는 걸신 들린 아이처럼 책에 빠져들었다. 몇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세지 못할 만큼 읽었다. 그 위인전 첫 권 첫 장의 첫 인물이 바로 ‘가가린’이었다.


이십여년 전 술취한 나에게 그가 가가린 얘기를 했을 때 내가 물었다.


“마가린? 마가린이 사람이름미와아야?(혀꼬임)”


“이런 무식한!”


그는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


“어떻게 가가린을 몰라? 어떠어케! 하… 가가린이라고 마가린이 아니고! 최초의 우주… 비행사라고! 처먹는 게 아니고!”


그는 제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마가린과 가가린만 갈갈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엊그제 만나서도 그 얘기를 했다. 친구는 자기가 그랬냐며 웃었다. 벌써 열 번쯤 똑같은 반응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기억력이 쇠하다 못해 미천해져서 기억을 잘 못한다. 그리고는 역시나 똑같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했냐? 내가 그렇게 지랄했는데 설마 내를 살려준 거냐?고.


그러나 나 역시 그건 기억에 없다. 아마도 이렇게 혼자 중얼대진 않았을까?


“음… 마가린이 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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