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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은 정중하게, 존댓말은 다정하게

part 2. 그때 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었을 말들

실무자로서 갖는 궁금증 및 도전 중의 하나는 

한국 내에서 수평적 소통, 수평적 조직이란 얼마나 가능한가에 대한 점이다. 

일부 국내 대기업들과 외국계 기업들은 직책을 없애고 

서로 ‘님’으로 부르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 그 결과는 신통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본 수업에서는 한 학기 동안 수업 참여자와 강사 사이에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자 한다. 

즉, 강사와 수업 참여자가 서로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고 

반말로 수업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김 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238쪽     




“나는... 벌레가... 싫어요...”     


좀처럼 조짐이 보이지 않아 담당 한의사, 소아과 의사에게까지 걱정을 샀던 아이의 말문이 드디어 터졌다. 3년 8개월 만이었다. 4살짜리가 뒤늦게 입을 연 것도 대견한데 꼬박꼬박 존칭까지 쓰니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가르치기도 힘들다는 존댓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부부간에도 서로 높임말로 대화하자고 급하게 합의했다.


그런데 그 오물거리는 입으로 사랑스럽게 내뱉던 존칭어가 어느 순간 나에게만 예외가 되었다. 

     

“아들아, 너는 다른 어른들한테는 다 존댓말 하면서 왜 엄마한테는 반말 써?”     


아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친구잖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친구는 아닌데 싶어서 일부러 ‘이랬나요, 저랬나요’ 하며 더 공손히 말해 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짜증이 날아왔다. 친구끼리는 존댓말 쓰는 거 아니라면서. 요즘 세대들에게 존칭은 예전처럼 상하 관계가 아니라 원근의 의미라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구식 엄마에게 제대로 알려준 셈이다.      


“아빠, 식사는 하셨나요?”

“응, 아빠는 오면서 대강 먹었어.”

“엄마도 밥 먹었어?”

“으응, 이제 먹으려고.”     


지금도 아들은 같은 공간에 있는 아빠에게는 높임말을, 엄마인 나에게는 예사말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대화하고 있다.      


참으로 존댓말과 반말. 쉽지 않은 문제다.     

 

예전에 참여자 모두의 파안대소로 시작했다가 누군가의 붉으락푸르락 기미에 어색하게 급히 마무리되었던 ‘반말 게임’이 떠오른다. 대학 때 익숙하던 방식대로 “00 선배~”하고 불렀다가 “너는 00 선배가 뭐니? 00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건방지게!” 하며 입사 초기에 된통 혼났던 기억도 있다. 

    

20에서 21로 세기가 바뀌었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통용되고 있다. “고객님, 이리 오실게요.”등의 말투도 여전하다. 혹시라도 일시적인 갑들에게 행여 기분 나쁘게 들릴까 봐서다.   

  

물론 작은 변화도 없지는 않다. 선배님을 선배라고 불러서 주의를 들었던 나를 후배들이 부르는 방식은 “선배야~”, 또는 “언니~”등으로 각자의 개성에 따른다. 전자는 경상도식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한다. 후자는 남동생과 자란 탓에 그렇게 불릴 기회가 많지 않아서인지 마치 친자매 같은 친밀감마저 느껴진다. 누군가의 건의로 이런 호칭들은 바로 정리됐지만.     


나 역시 후배들에게 성별 불문 “자기야~”로 시작한다. 막상 아이 아빠에게는 사어(死語)인 ‘자기야’를 ‘자기 마음대로’ 써대니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거부감이 드는 후배도 있겠지만 부디 나처럼 좋게, 좋게 해석해 주기만을 바란다.     


일찍이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선, 후배 선수 구분 없이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경기 때 서로 반말을 하게 했다는 히딩크 축구 감독의 일화는 유명하다. 전형적인 상명하복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여러 회사에서 직함을 ‘님’으로 통일한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단, 임원들에게는 예외로 한 곳도 있다고 하니 아직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경어’가 무조건 상하 위계와 그로 인한 갈등 및 소통의 부재를 조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이로 인해 내외지간에 공손 어법이 익숙해지다 보니, 소모적인 입씨름 대신 의견 개진이라는 이름으로 싸움의 횟수와 정도를 확실히 덜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한쪽만 존댓말, 나머지는 일방적으로 반말을 썼다면 어땠을지 가정하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한편 동갑내기 부부라 서로 예사말을 쓰면서도 친구처럼 별 탈 없이 지내는 커플도 여럿인데,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결국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존댓말과 반말 기저에 깔린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선배와 후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손님과 점원 서로 간에 언제든지 입장은 변하고 상황은 바뀔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도 필요하다.      


그런 진심이라면 정중한 존댓말이든, 다정한 존댓말이든, 정중한 반말이든, 다정한 반말이든 상하, 원근 상관없이 그때, 그때 적절하고 다양한 버전의 말투로, 꽁꽁 막혔던 마음의 문을 뻥뻥 뚫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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