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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오지랖도
상처가 될 수 있다

part 2. 그때 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었을 말들

“아들이 잘생겼다. 아빠 닮았나 보다.”

“아들이 키가 크네. 아빠 닮았나 봐요.”

“아드님이 어휘력이 좋아요. 아버님이 책을 많이 읽나 봐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다는 자식 칭찬인데, 내 입으로 하려면 돈 내고 해야 한다는 팔불출 소리를 가끔 들르는 소아과 주치의와 처음 보는 백화점 가판대 판매원과, 방학 특강 체육 선생님에게서 먼저 들으니 감사하고 고맙긴 한데 뭔가 좀 이상하다. 소심하고 쩨쩨하지만 빠릿빠릿하지 못한 나는, 그래서 폐부를 찔리거나 인신공격적인 농담에도 바로 받아치지 못하는 나는 한참의 정적 후에 뭐가 걸리는지 깨닫는다.    

 

‘그래, 그 칭찬에 이상하게 나만 쏙 빠져있어. 나는, 나는?’     


그래도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 했으니 나보다 뭐가 좀 더 나아 보이는 구석이 있나 싶어서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자식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이 아니라 부모의 행복이 자식의 행복이라는 말도 있지만 칭찬만큼은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요, 부모 중 한 명인 나를 젖혀놓더라도 까짓 거 뭐 진심 웃으며 대꾸할 수 있다.      


“네, 저랑 아이랑 별로 안 닮았죠?”

“네, 아이 아빠가 덩치가 꽤 커요!”

“네, 저는 책을 많이 안 읽는데, 아이 아빠가 좀 많이 읽죠.”      


이웃들의 참견과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의 오지랖을 통해 오히려 내가 알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정보와 사실들을 새삼스레 알아가고 확인한다. 어쩌면 매일 붙어사는 엄마보다 더 ‘직관적’이고 ‘객관적’ 일 수 있기에 꼭 심기가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날 좀 안다 싶은 가까운 사람이 툭 하고 내뱉은 말은 꽤 깊고 아린 생채기를 내고는 한다. 그 상처는 두고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좀처럼 썩지 않는다는 인스턴트 감자튀김처럼 유통기한이 무한정이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넌 왜 S 대를 못 갔냐?”     


중세시대의 암흑기 같았던 30대를 견디어보겠다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주경야독으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친 나에게 한 선배가 무심히 던진 말이었다.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새벽 라디오? 그거 듣는 사람은 있니?”     


지난 10년을 한결같이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출근하고, 사무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불을 켜고, 선곡하고, 원고를 쓰고, 녹음, 편집, 송출하면서 동굴 같은 스튜디오에서 곰처럼 살고 있는 나에게 한 선배가 가볍게 날린 말이었다.     


말을 듣는 그 당시엔 입이 딱 얼어붙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그 후에 생각에 생각이 긴 꼬리처럼 이어졌다. 후배들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가끔은 뼈아픈 독설을 날리는 그들의 말 패턴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짐작이 가는 바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상처를 받는 사람은 혼자서 아픕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주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과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친 마음 수리하기, 정준용 지음, 북카라반. 5~6쪽     




하지만 그 사람들의 원래 성격이나 예전의 가정환경, 지나온 아픔들까지 헤아리며 왜 그 말을 했는지 이해해보려 애쓸 여력이 더 이상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의 눈의 대들보보다 내 눈의 티가 더 따끔한 법이니까. 남의 해묵은 가슴속 상흔보다 내 지금 심장에 꽂힌 화살이 더 통렬하니까. 내 당장의 상처가 더 시급하니 말이다.     


문득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모든 후배들을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와 그렇지 않은 아무개로 구분했던 선배들에게, 그리고 그것이 ‘공과 사’라는 구분 없이 적용되었던 한때의 상황에서 나는 왜 그토록 인정받기를 원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회사를 떠나 자연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지 의아해졌다. 그러고 보니 참 덧없는 일이고, 무의미한 일이고, 아무 소용없는 일이고, 그리 안달복달하거나 아쉬워할 일도 아니었는데.  

   

인간의 인정 욕구는 ‘인정투쟁’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제2의 본능이자 천성이라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과 결과물을 인정해줄 마음의 그릇과 준비가 안 된 이에게는 굳이 인정을 애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참 여전하시네요.”라고 부드러운 일침을 가할 것 그랬다는 일말의 아쉬움까지 생겼다. 어금니 꽉 깨물며 미소를 띤 채로.     


미국의 동기부여 전문가 레스 브라운의 말처럼 사사로운 몇몇 의견이 내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알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가 내 하나뿐인 인생을 흔들고 좌지우지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그 말들은 나를 대표하지도, 규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사탄의 인형’ 같은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날리는 ‘말 독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들은 여전히 가슴 짠한 사람이다. 세월의 힘으로 상처도 정도껏 품을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그것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앞으로 넌지시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사드리며 농담처럼 건네 봐야지. 기왕이면 서로에게 끝까지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되려면 말이다.     


상처는 어쩌면 짝사랑과 비슷합니다. 

상대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 그 사람이 무릎 꿇고 사죄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변해야 합니다. 

상처만 받던 예전의 나와는 달라져야 합니다. 

상처 주는 이들이 나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비장의 기술을 한 가지는 갖고 있어야겠지요.     


아, 글을 마치기 전에 혹시나 첫머리에 은근한 자식 자랑 아니냐고 하실 분이 있을까 싶어 덧붙이고 싶다. 내 아이는 요즘 말하는 야리야리하게 예쁘장한 아이돌의 모습은 아니다. 어른들이 선호하시는 ‘달덩이같이 복스럽게 자~알~ 생긴’ 스타일이다. 해맑게 웃으면 볼 속으로 눈이 파묻힌다. 자동차, 외계인, 미지 동물, 고생대 생물 등 본인의 관심사에서만큼은 어려운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수업 시간만 되면 매번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고 한다. 선생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는 혼나기 일쑤다. 사교육비를 아껴서 노후대책에나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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