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 이야기

첫 경험

by ziwoopa

본격적으로 몸에 털이 자라기 시작한 중 1 때(1982년)부터 스트레스는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멋지게는 아니더라도 골고루 삐져나와서 그럭저럭 빈틈이 안 보이지만 초기에는 길이도 제각각에 위치도 제 맘대로 털이 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모(多毛) 유전자를 물려주신 아버지가 면도하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감히 몸에 칼을 댄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다리털은 또 왜 그렇게 시커멓게 나는지...




중 2 더위가 시작되면서 반바지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첫 체육수업 시간. 미리 등나무 스탠드에 모여 앉아있던 우리들을 훑어보시던 선생님이 나를 지목해서 부르셨다. “야! 너 나와!” 영문도 모른 채 긴장하고 나간 나를 다시 보시더니 그냥 들어가라 신다. 그때 하시던 혼잣말이 나에게 상처를 줬다. “아!! 털이었구나...”. 아마도 반바지가 아닌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게다. 그즈음부터 다리는 시커멓게 털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렇게 버티던 나는 중 2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아버지가 안 계신 틈을 타서 면도에 도전을 했다. 그 당시 살던 집이 욕실이 따로 없고 바깥 수돗가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어서 참 난감했었다. 아버지가 면도하시는 모습은 많이 봐왔지만 어떻게 준비하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일단 무작정 시작했다.


때는 추운 겨울. 찬 물을 세숫대야에 받아놓고 아버지가 쓰시던 도루코 면도기를 꺼내 들었다. 손잡이 밑을 돌리면 마징가 머리에 제비호가 들어갈 때 열리듯 뚜껑이 열리는 면도기였다. 거품도 낼 줄을 몰라서 (쉐이빙폼을 접한 건 20대 후반이었다.) 찬물을 묻혀 무작정 비벼 얼굴에 발랐다. 부족한 것 같아서 그냥 비누를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추워서 떨리기도 했지만 첫 면도라는 긴장감에 손을 덜덜 떨면서 면도기를 오른쪽 뺨에 대고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후드득...


털이 깎였다는 느낌보다는 면도날이 털을 타고 넘으면서 살에 닿는 느낌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찬 바람에 얼굴은 점점 얼어가고 거품도 아닌 비누 코팅은 점점 굳어가고 몇 번 더 시도했던 면도질은 털을 타고 넘은 면도날에 볼 살이 파여 밭고랑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대충 찬물로 씻어내고 방에 들어와 거울을 본 순간 너무도 처참하고 황당하지만 웃픈 모습에 절망을 하고 말았다.


저녁에 들어오신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시고는 알 수 없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시며 부지런히 준비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밖은 추운 관계로 하나뿐인 방에서 겨울밤 아들의 첫 면도 강의가 시작될 참이었다.


물을 끓여 더운물로 그 당시 이발소에서나 쓰던 거품 내는 컵(비슷)과 붓으로 계란 거품 내듯이 휘저어 풍성한 거품을 만드셨다. 그러고는 캐비닛에서 A급 새 면도기와 새 면도날을 꺼내어 소독을 하시고 상처가 나지 않은 왼쪽 얼굴을 교보재로 시연을 해주셨다. 이때 여자 형제들과 엄마는 둘러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털의 방향도 고려해야 하고 면도기를 쥐는 방법, 날의 각도 등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야 함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비록 오른쪽 뺨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아수라 백작처럼 반쪽만 털이 없는 상태로 지내야 했지만 (방학인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ㅠㅜ) 왠지 남자가 된 듯한 느낌에 한없이 뿌듯하고 그랬다. 물론 그날이 앞으로 몇십 년을 털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작인걸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전기면도기도 써 봤지만 털에 걸려 돌지도 않는 어처구니없는 처지라 다시 칼을 써야만 했다. 날 하나에 몇 천 원씩 하는데도 두 번 이상 쓰지 못하는 굉장히 비싼 털이다. 내 키가 안 자란 것도 몸에 양분을 다 뺏어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털들 때문이다.


군대에서 또 한 번 첫 면도 때와 비슷한 (추운 겨울, 찬물, 하이 크림 디 비누, 1회용 면도기) 상황을 겪으면서 얼굴에 피딱지를 달고 있던 신병 시절. 구타를 당해 상처가 난 걸로 착각했던 대대장의 특별 조치 덕분에 난 유일하게 부대에서 수염을 기르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경험도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난 털에 대해서 할 말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새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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