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말이 더 자주 오해되는 이유. 언어화, 주의집중시간
오래 함께 일해온 한 임원과 단둘이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타 부서와의 중요한 실무 회의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임원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팀원들은 임원과 사전 회의를 진행했고, 그 자리에서 나온 의견들을 정리해 실무 회의에 임했습니다.
실무 회의는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회의 결과를 임원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임원은 제가 전달한 의견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다며 당황했습니다. 함께 참여한 팀원들도 놀랐습니다. 사전 회의에 참석했던 누구도 임원의 의견을 그렇게 이해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과 보고가 끝난 뒤, 임원은 저를 조용히 따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고민을 털어놓듯 말했습니다.
"요즘 직원들이 내가 회의 때마다 말이 바뀐다고 하더라. 네가 보기에도 그래?"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회의 때마다가 아니라, 회의 중간에도 말이 바뀌시죠."
저는 곧바로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사실 요즘 왜 그러실까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요. 사람은 말을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을 시작하셨다가, 말을 이어가며 점점 더 생각이 명확해지시는 거죠. 그래서 처음 하신 말씀과 나중에 하신 말씀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직원들 입장에서는 회의에서 해주시는 말씀을 모두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 여러 방향의 의견이 동시에 나오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죠.”
임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네. 그런 것 같다. 직원들은 내가 말이 자주 바뀐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
깊이 생각한 후 정리된 말이 입에서 나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반대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하며 생각이 정리됩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곧 사고의 연장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언어화(Verbalization)라고 부릅니다.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오른 생각들이 말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깥으로 꺼내지는 순간, 비로소 논리와 구조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기 전에는 몰랐던 내 생각이 입 밖으로 꺼내고 나서야 명확해집니다.
회의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생각이, 자신의 말을 다시 되짚으며 점점 구체적인 형태로 다듬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의견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완성되는 중인 사람의 자연스러운 흔들림입니다. 말실수가 아닌 생각이 정렬되는 지극히 건강한 현상입니다.
연인과 다투고 나면 쉽게 감정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엔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며칠 뒤, 친구에게 조심스레 그 일을 꺼내 이야기하다 보면 그렇게 까지 싸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화가 났던 건 맞지만 그 원인이 생각보다 사소하고, 서로가 그렇게 날카로울 필요는 없었다는 걸 말이 정리해 주는 거죠.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엔 혼란스러웠던 내 입장이, 말하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주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학생에게 개념을 직접 설명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해도와 문제 해결 능력이 높아진다는 연구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혼잣말처럼 스스로에게 설명을 덧붙이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더 깊이 사고하며 오류를 스스로 발견해 바로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말로 문제를 풀어가는 아이는 공식을 단순히 외우는 것을 넘어, 원리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힘이 훨씬 강합니다. 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가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언어화는 꼭 '말'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글'도 생각을 끌어내어 형태를 갖추게 만드는 또 하나의 언어화 방식입니다. 생각은 많은 것 같지만, 막상 글을 쓰려하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몇 줄이라도 억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하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깨닫게 됩니다. 머릿속에 없던 게 아니라, 아직 꺼내지지 않은 채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뿐이었던 겁니다. 말이든 글이든 표현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으로 정리되어 갑니다.
이 언어화는 직장의 회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집중시간의 개념이 겹치면, 생각보다 큰 문제가 생깁니다. 회의 초반, 말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의견은 모호하고, 표현은 왔다 갔다 합니다. 하지만 회의가 이어지며 질문이 오가고,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들으면서 말하는 사람도 조금씩 자기 입장을 정리해 나갑니다. 결국 회의 중반쯤, 또는 거의 끝날 무렵에야 진짜 말하고 싶었던 의견이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그 타이밍입니다. 사람의 집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주의집중시간(Attention Span)이라고 부르죠. 보통 처음 10~20분이 집중력이 가장 높고, 그 이후부터는 점점 하락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지만, 30분쯤 지나면 스마트폰을 확인하거나 다음 일정을 떠올리며 멍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말하는 사람은 이제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듣는 사람의 주의력은 이미 떠나 있습니다.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가장 집중력이 낮은 순간에 나오는 셈입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난 뒤, 정리되지 않았던 초반 대화만 어색하게 기억에 남고 정작 핵심은 스치듯 흘러가며 오해만 남기도 합니다.
임원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두 가지 그라운드 룰을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말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을 땐 반드시 그걸 짚어주는 것입니다. 회의 중간에 방향이 달라졌다면 "지금 이야기 나누다 보니 처음과는 생각이 달라졌네요" 같은 한마디라도 꼭 덧붙이기로 했습니다. 그건 듣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먼저 변화된 입장을 짚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지금 흐름이 바뀌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고, 그만큼 혼란도 줄어듭니다.
두 번째는, 회의가 끝난 직후 그 자리에서 정리된 입장을 함께 확인하는 것입니다. 회의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 서로 공감했습니다. 회의 내내 흩어졌던 시선을 다시 한 곳으로 모아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꼈습니다.
회의는 누군가에게는 생각이 정리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같은 타이밍에, 같은 맥락으로 함께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회의는 비로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