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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의 공간이 비어야 책이 들어온다

독서는 처음이지?

by 에밀


 책은 마음이 빽빽할 때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눈으로는 글자를 따라가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하다.

 오늘 해야 할 일, 내일의 일정, 처리하지 못한 대화들.

 그 조각들이 마음속을 떠돌며 문장 사이를 가로막는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마음에 자리가 없어서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문장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내 안의 빈자리에 새로운 생각을 앉히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이 꽉 차 있으면, 그 자리에 문장이 들어올 틈이 없다.

 우리는 종종 ‘읽기 위해’ 더 많은 걸 채우려 하지만,

 사실 독서는 ‘비움’을 전제로 한다.

 생각이 가득한 머리로는 아무리 읽어도 마음에 닿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메모를 하고, 요약을 하고,

 정리까지 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문장은 머리에만 남고, 마음에는 스며들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책은 정리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라는 걸.


 진짜 독서는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비워 내는 일이다.

 책을 읽기 전에 머리를 정리하고,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단 5분이라도 좋다.

 깊게 숨을 쉬고, 나를 복잡하게 만든 생각들을 잠시 멈추면 된다.

 그러면 문장이 조금씩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움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맞이할 준비다.


 책은 늘 자리를 비워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다.

 빈 마음이야말로 문장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있을 때, 문장은 흘러들어와 나의 일부가 된다.

 책이 나를 바꾸는 순간은 이해할 때가 아니라 느낄 때다.

 그 느낌은 언제나, ‘비워진 마음’에서 온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날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게으르거나 산만해서가 아니다.

 마음이 잠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그럴 땐 책을 덮고, 잠시 비워내자.

 책은 언제든 그 자리에 있다.

 당신의 빈자리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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