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이 싫다...

by Tugboat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마른 잎 하나가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늦가을 그리고 오후 네 시.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세상의 채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시간이다."




사선(斜線)으로 눕는 햇살의 잔인함


사람들은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 추켜세우지만,

내 눈엔 그저 '상실의 계절'로만 보였다.

초록으로 벅찼던 산들이 핏빛으로 물들다 이내 검게 타들어 가는 과정.

그것을 단풍이라 부르며 즐기는 사람들의 유희가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이 맘 때의 오후 네 시는 잔인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 안식을 주는 것도 아닌 시간.

비스듬히 누운 햇살이 사물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 위로 누런빛이 덧칠해진다.


내일 다시 해가 뜬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는 태양을 보고 있자면,

그것이 잠시 자러 가는 게 아니라 영영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을을 탄다"는 말은 너무 가볍다.

이건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론적 공포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 저 해처럼,

저 낙엽처럼 속절없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자각이랄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창틀에 놓인 화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꼿꼿했던 잎사귀 하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물이 부족한가 싶어 손가락으로 흙을 눌러보았지만 축축했다.


"너도, 가는구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가을이 싫었다.

차라리 보이지나 말지, 왜 눈앞에서 이토록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지.


말라비틀어진 잎을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가, 문득 멈칫했다.

손을 대기도 전에 잎이 스스로 가지를 놓고 흙 위로 떨어졌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잎은 밀려난 게 아니다. 스스로 놓은 것이다.


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다가올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화려했던 겉치레를 유지할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지금 잎을 떨구지 않으면 뿌리까지 얼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창밖의 앙상한 가로수들이 다시 보였다.

저것은 죽어가는 풍경이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본질'인 뿌리를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장식들을 과감히 잘라내는 결단이었다.


나무는 잎을 버리는 게 아니다. 생명의 근원인 뿌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한 해 동안 밖으로 뻗치는 데 썼던 힘을, 이제 내면으로 거두어들이는 시간.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이 오후 네 시의 우울함도, 어쩌면 신호가 아닐까.

이제 그만 바깥세상을 향해 뻗었던 시선을 거두고,

나 자신의 내면으로, 나의 뿌리로 돌아오라는 신호.



겨울, 차라리 정직한 거울


어느새 11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제 12월이다.

사람들은 11월과 12월을 가을과 겨울로 명확히 구분하려 들지만,

계절은 칼로 무 자르듯 오지 않는다. 그저 스며들 뿐이다.

12월을 가을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내 마음의 풍경은 여전히 늦가을의 쓸쓸함과 초겨울의 황량함 사이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밖을 나서니 뺨을 때리는 찬 바람이 오히려 반가웠다.

어설프게 따뜻해서 미련을 남기는 늦가을보다는, 차갑고 매서운 겨울이 낫다.


찬 공기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낸다.

가식적인 관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억지로 붙들고 있던 체면, 과거의 영광에 대한 집착.

이 추위가 그 모든 껍데기를 날려버리고 나면, 결국 내 곁에는 진짜 소중한 것들만 남을 것이다.

단단한 씨앗처럼.


나를 우울하게 했던 오후 네 시의 햇살.

이제 보니 그것은 죽음의 빛이 아니라,

"이제 그만 애쓰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다정한 등 떠밈이었다.


치열했던 하루를, 그 전투 같았던 젊음을 내려놓고,

따뜻한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혹은 내 마음의 가장 편안한 방으로 돌아가라는 자연의 섭리였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느끼는 그 쓸쓸함은, 내가 헛살았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동안 잎을 피우고 열매 맺느라 누구보다 고생했던 나의 뿌리가,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보내는 간절한 신호일 뿐이다.



빈 들이 되어야 눈이 내린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덕분에 내 방의 작은 스탠드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밖이 어두워질수록 안은 밝아진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은 순간에도,

내면의 빛은 그 고요 속에서 가장 또렷하게 타오른다.


겨울이 온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듯,

거스를 수 없는 이 계절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빈 가지가 되어야 눈꽃도 핀다.

가득 채우려 아등바등했던 손아귀의 힘을 푼다.


오늘은 그저 따뜻한 차 한 잔을 우려내며, 저무는 것들을 배웅해주려 한다.

잘 가라, 나의 가을.

그리고 어서 와라, 나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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