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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니 Oct 02. 2023

숙근초의 삶: 괜찮아도 괜찮아

가끔은 회피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아닐까?

식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겨울을 난다.


오늘 소개할 개념은 숙근초이다.


숙근초는 여러해살이로 겨울에 지상부는 말라죽고 땅 속에 뿌리만 남아 이듬해 봄에 새 순을 틔우는 초본 식물을 말한다. 사계절이 있는 온대 기후에서 추운 겨울을 그런 식으로 견디는 것이다.



대표적인 숙근초로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민들레가 있다.


오히려 추위를 피하지 않는 한해살이 식물들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뿌리 깊은 나무들 또한 겨울철 냉해를 입기도 한다.


각자의 생태원리이고 그 방식에 옳고 그름은 없지만 나는 숙근초의 삶의 원리가 마음에 든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힘든 일은 늘 한 번에 온다.


나는 그게 2021년이었다.


삶이 버겁게 느껴졌다.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저기서 일부러 날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나의 원칙이었다.


어릴 적 나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직성이 풀렸고 싸울 거면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화해를 할 거면 화해를 하고 말지 그냥 넘어가는 것은 나의 방법이 아니었다.


인간관계를 넘어서서 나는 매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는 것에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임용시험도 대학생활과 병행하여 아득바득

냈다.


힘든 상황에서 회피를 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여느 때처럼 혼자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 치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당연한 결과겠지만, 마침내 번아웃이 왔다.


무기력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책상 앞에 앉으면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일 밤 잠이 안 와 3시, 4시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누워있으면 눈물이 흘러서 귀에 고였다. 그렇게 울고 나면 또 잠이 깨서 한참 뒤에 잠들 수 있었다. 미래가 안 보인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그때를 겪으며 배웠던 것은 모든 문제를 내가 다 해결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피해야겠다. 그게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구나


약한 건 잘못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해질 수 있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뿐이다.


상황을 외면하고 일부 문제에 대해 마음을 놨더니 마음은 편해졌다.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문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릿느릿 해결이 되어갔다.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숙근초는 힘든 시련이 오면 추위에 맞서는 것이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 추위를 피한다. 꼭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낼 필요는 없다.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강하다고 여겨지지만  스스로를 보호하는 현명함 또한 강한 것이다.


겨울은 언젠가 끝나고 봄은 다시 온다.  말은 시간이 약이라는 거다. 삶이 너무 고달프면 숙근초처럼 잠시 겨울을 피해있다가 다시 봄이 왔을 때 피어나도 된다. 그것이 여러 해를 사는 비결이다.


단단한 나무는 거센 바람에 부러지듯 오히려 추위를 견디려고만 하면 한 해 밖에 못 산다.


견디는 것이 너무 괴로우면 일단 피하자. 시간이 지나 내가 충분히 회복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 때 찬찬히 다시 싹을 틔우자


그래도 늦지 않다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도록 나를 지키는 게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아팠던 만큼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살다 보면 또 힘든 일이 예고도 없이 툭툭 튀어나올 거고, 삶이라는 게 늘 평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런 날이 오면 또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해봤으니까! 이제는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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