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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Sep 24. 2021

유치하지만 반짝이는 열두 살 아들의 시

읽을수록 순박하고 귀여워

예전에는 별 공감이 안 되는 책은 읽다 포기하거나 중간중간 뛰어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대충 읽더라도 끝까지 읽고, 하나라도 얻을 거리를 찾아 메모하게 된다.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에겐 공감이 안 되고 재미없는 글일 수 있으나, 글쓴이의 인내와 정성이 담긴 결과물이기에 허투루 대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쓴 글도 그렇다. 즉흥적으로 색종이에 써서 건넨 편지 한 장, 날아가는 글씨체로 쓴 시詩 하나도 쉬 버릴 수가 없다. 아이들의 글에는 꿀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인가? 더없이 달콤하고 사랑스럽다.


아들들은 글쓰기 할 때 한 바닥을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아니, 써 내려가긴 한다. 여행지 정보나 다녀온 감상은 1도 없이 먹은 음식만 주르륵 나열해 놓은 베트남 여행기. (먹는 게 8 할인 여행이긴 했다.) 동생과 싸우고 열폭한 자신의 감정만 잔뜩 늘어놓은 제목만 '추석' 등. 쓴 글을 보고 있자면 한마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때도 있다.


학교 과제로 쓴 글은 종종 온라인 과제 방에 올려져 공개 토론 수업으로 활용된다. 한눈에 비교되는, 또박또박 예쁜 글씨의 잘 써진 글들을 보면 굵직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마음 깊은 곳 웅크리고 있던 조바심이 불쑥 머리를 드는 순간이다. 그래, 그렇다 해도 죄다 엉망은 아니다. 알맹이, 기승전결 없이 다듬어지지 않는 글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열에 둘셋은 괜찮네 싶은 글이 있기에 입을 틀어막는다. 멋 부리고 잔뜩 힘이 들어가거나 베껴 쓴 글이 아닌, 서툴지만 아이다운 몇몇 글을 위안 삼으며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겨울>

새싹이 파릇파릇
동물이 기지개 켜는
봄이 이겼다.

쨍쨍 츄르릅 츄르릅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여름이 이겼다.

귀뚜울 귀뚤 아삭
맛있는 음식이 많은
가을이 이겼다.

늘 지는 겨울은
펑! 펑! 울었다.



,


작년에 첫째가 쓴 시이다. 열두 살이 썼다기에 유치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너무 귀엽. '겨울'에 대해 써야지 제목은 정했는데 막막하다는 첫째와 일단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쓰고 싶은지 물어보니 봄, 여름, 가을과 비교해서 쓰고 싶단다. 봄은 어떻지? 여름은 어떻지? 가을은? 옆에 메모해가며 가닥을 잡는다. '츄르릅', '귀뚤귀뚤' 등 의성어 위주로 표현하는 아이에게 소리가 아닌 모양으로도 표현해 보도록 유도했다. '쨍쨍', '쭈욱', '펑펑'. 말한 단어들을 흐름대로 상상해보라 했다. 그리고 시의 형식에 맞게 세 줄씩 정리하고 행 간격도 주었다.


'늘 지는 겨울은'과 '펑!펑! 울었다.' 사이에 '하얗게 하얗게' 한 줄 더 넣어 운율을 맞췄으면 좋겠다. 계절별로 조금만 더 디테일하게 표현했으면 좋겠다. 또또또 엄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엄마가 말이 더 많아지는 순간, 눈이 초롱초롱하던 아이의 이마 사이에 주름이 생기고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그만 해야 할 순간이다.


이만큼만 해도 잘했다. 읽을수록 순박하고 귀엽다. 내가 써도 이보다 잘 썼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아이 혼자 썼다면 시詩인지 아닌지 헷갈렸을 수도 있겠다. 함께 하는 글쓰기가 혼자일 때보다 재미있네. 사춘기에 접어든 첫째, 앞으로는 잔뜩 뾰족하고 한껏 거칠어질 텐데. 그전에 아이와 시를 몇 편 더 써 보고 싶다.




Photo by Aromatee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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