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08:00
KO 1패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오늘은 6학년 학예회가 있는 날. 첫째는 친구들에게 퀴즈를 내겠다며 한동안 난센스 문제를 알아봤다. 그러다 며칠 후 마술을 해야겠다며 유튜브를 붙잡고 앉아 온갖 마술 영상을 섭렵했다. 쇠막대기로 혀를 뚫는;; 마술을 하겠다며 이틀을 맹연습한 아이가 제법 그럴싸하게 연기하기 시작할 즈음 "아, 맞다! 이 마술 못해요. 마스크 내리면 안 되잖아요." 란다.
결국 첫째는 연극만 하겠다며 연극 대본을 찾기 시작했다.(담임선생님께서 장기자랑 안 하는 친구는 교과서에 실린 연극을 준비하라고 하셨단다.) A4 반쪽 짜리 대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월요일 오전 8시 한창 바쁠 시간에 나더러 함께 찾아달란다. 학교 활동지 모은 파일을 바삐 뒤적거리는데 아이가 말한다.
"엄마, 이것 좀 타 주세요."
"내가 놀고 있냐? 니가 타 먹어!"
주말에 시댁에 다녀왔는데 어머님께서 타트체리 엑기스를 주셨었다. 매실청이나 미숫가루였으면 아이가 알아서 타 먹었을 것이다. 타트체리라니 나도 처음 듣는 과일이다. 아이도 처음 보는 엑기스라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엄마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알면서도 아이에게 뾰족한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내가 놀고 있냐? 니가 타 먹어!"라고. 주섬주섬 부엌으로 간 열세 살 아들이 혼잣말로 나를 KO(knockout)시킨다.
"아, 왜 급발진이야."
월요일 08:20
KO 2패
이따 타 줄게라던가, 어떻게 타 먹으면 되는지 얘기해주면 되지,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라는 아이. 틀린 말 하나 없다. 활동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내게 아이가 말한다. 최근 수업이라 활동지 폴더 앞부분에 없으면 그 안에 없는 거라고. 그냥 연극 대본 중 자기 분량만 프린트해 주세요 라고.
"엄마 이거 해야 하니까, 니들이 밥 차려 먹어!"
화딱지가 난 내가 소리쳤다. 잠시 후
"달걀 몇 개 넣을까?"
아이들끼리 꽁냥꽁냥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아... 밥, 콩나물국, 제육볶음 다 냄비에 담겨있고 담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이 빠듯한 시간에 뭘 새로 해 먹겠다는 거야? 달려가 한마디 하고 싶지만 꾹꾹 눌러 담는다. 잠시 후 첫째가 내게 와 노란 무언가를 들이민다.
"엄마, 아~ 이거 드셔 보세요"
"됐어!"
"제가 지금 만든 거예요. 어서요."
맛. 있. 다.
노릇노릇 기름 냄새, 그리고 새콤달콤 케첩을 뒤집어쓴 두툼한 계란말이가 나를 또 한 번 KO 시킨다.
"내가 만든 계란말이"라며 친구에게 카톡까지 보내고 등교한 첫째
월요일 08:40
KO 3패
달걀말이를 내 입에 밀어 넣고,
모니터 하단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는 첫째.
"영하 12도? 이런 날은 청자켓 두 개는 입어줘야지!"
두툼한 오릿털 점퍼를 제치고 청색, 검은색 청자켓 두 개를 꺼내 입는 녀석. 기온은 영하 12도지만 체감온도는 무려 영하 15도다. 저 녀석 감기라도 걸렸다가는 며칠 안 남은 등교일마저 가정 학습해야 할 판인데.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건만 아이는 학예회 생각에 신이 났는지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른다. "오랜만에 모자 쓰고 갈까? 엄마, 모자 쓰고 가면 탈모 올까요?"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아이가 신발을 신고 문 밖을 나설 때까지 혼자 되뇌는 수밖에. 체감온도 영하 15도, 한파 경보의 날씨에 아이는 결국 청자켓을 입고 등교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KO 당했다.
월요일 09:00
KO 4패
12월 25일 크리스마스와 토요일이 겹쳐 대체휴일로 오늘까지 쉬는 남편. 아이들이 등교하니 부스스 일어난 남편이 강 건너 불 구경하고 난 듯 한마디 한다.
"아침부터 한 바탕하는 것 같던데?"
또 한 번 의문의 1패. 오늘 하루 무려 나의 4연속 KO 완패.
성미 급한 아내와 세상 느긋한 남편,
욱 하는 엄마와 뒤끝 없는 아들.
뭐지? 요즘 자꾸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지는 듯한 이 느낌은?
Photo by Matese Field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