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하신 건 못 나오고요, 여기 나이만 나왔습니다

8월 22일

by GIMIN

어른이 되면 핸드폰 안테나를 길게 뽑아서 쓰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길게 뽑은 안테나를 멋지게 휘두르는 어른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핸드폰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타일러스 펜을 뽑을 때마다 나는 안테나를 빼냈다가 집어넣을 때 느꼈던 재미를 잠시나마 되찾았다.


도서대여점에 갈 때마다 제일 안쪽에 들어가는 일을 망설였다. 안쪽 코너에 자리 잡은 할리퀸 로맨스 소설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소설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도서대여점은 호프집이 되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나마 소설을 빌려 보지 않았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하나.


맥주에 피는 거품을 보고 콜라와 비슷한 음료라고 생각한 나는 잔 안에 든 맥주를 입가에 가져갔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얼른 낚아챘다. 이건 어른들이나 먹는 거라고 친절하게 타일렀다. 문방구에서 맥주 사탕을 사 먹을 때마다 나는 이게 맥주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성년의 날이 지나서 마신 맥주는 달지 않았다. 거품에도 취한 나는 몇 잔 마시지도 못했다. 취했다기보다는 배가 불렀다. 그 뒤로 맥주를 마셨지만 매번 만족하지 못했다. 에일과 라거의 치밀한 공격에도 성벽은 끄떡없었다. 인생이 쓴 데도 소주는 달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과 더불어 술을 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때가 오면 다 안다고 그 시절의 어른들이 말했다. 어른이 된 나는 때가 와도 다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들은 것들은 막상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미 사라졌거나 빛바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라지고 내가 딱히 하고 싶지 않은 일만 늘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 채로 나이만 드는 기분이 과히 좋지만은 않다. 위시리스트에 넣어둔 상품들이 다 품절 처리되어 받은 것이라고는 나이 밖에 없는 것 같다.


환불하고 싶어도 환불할 수 없는 게 시간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요즘따라 부쩍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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