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앨범을 들었다.「So what」이 귀 안에 퍼지는 순간 고가철도 옆에서 검푸른 구름이 마치 생기 얻은 것처럼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노을에 천천히 적셔졌다. 트럼펫의 첫 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왔다.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집에 들어갈까 봐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한결 다르게 보였다. 개나리색으로 물들던 택배회사 건물도 주황색에서 붉은 기운을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노을빛을 받아 제법 그럴듯한 노란색으로 탈바꿈했다. 우중충한 날이나, 어두울 무렵이면 더더욱 눈에 튀던 벽도 노을 속에서는 그럴듯하게 비쳤다.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난 풀잎이 회색 빛을 띠며 시들어갔다. 스티로폼 박스를 화분 삼아 기르던 상추는 이제 다 안으로 들여간 것 같았다. 나는 휘어진 전봇대를 곁눈질로 보면서 걸었다. 길이 끝나고 울타리가 시작되는 자리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력서를 쓰다 말고 잠시 베란다로 나왔다. 창 밖에서 아파트 경비가 언덕길에 쌓인 눈을 넉가래로 열심히 밀었다. 잠시 마음이 답답해서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먼지 쌓인 방충망 사이를 세밀하게 통과하며 내 어깨 위를 지나갔다. 어쩐지 뱃속이 따듯했다. 처음에는 단전 밑에서 열이 울컥하고 올라오더니만, 이내 횡격막 근처를 뜨듯하게 데운다. 목이 메말라서 간지러웠다. 곧바로 마른기침이 나왔다.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 심실 밑 부분이 죄 헐어버린 느낌이 든다. 몸 안에 뜨거운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든다.
눈 오는 날이면 거울 속에서 마른오징어 눈깔보다 어두운 내 눈동자가 기억이 다른 기억을 건드렸다. 하나의 기억이 흔들거리며 두세 개의 기억을 건드렸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허여멀건 자국이 가슴께에 드러날까. 기침은 잦아들지 않는 걸까. 잦아드는 기침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던 나는 손목 안을 파고드는 더운 기운을 느꼈다. 묵주를 쥔 어머니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궤양이라는 단어의 질감을 생각하며 나는 창문을 닫았다. 손자국 아래로 물이 흘렀다.
나는 철로 위로 햇살이 미끄러지듯이 번들거리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열차가 지나가는 속도에 맞추어서 햇살은 철로를 따라 열차보다 뒤편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철로에 드리워진 햇살은 말갛다. 인중을 중심으로 살갗에서부터 온기가 스며들었다. 열차의 속도로 인해 반죽이 된 건물들은 햇살을 받아서 어제보다 흐린 얼굴 들었고, 철로에 깔린 자갈은 더욱 진한 그림자를 그득그득 안고 있다. 다들 그렇게 견디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