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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집, 녹슬고 녹슬어

by GIMIN

※ 영화 『아이리시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리시맨』을 신촌 메가박스에서 봤다. 처음 가 본 극장이었다. 부동산 대여 광고가 붙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보다 어두운 복도를 봤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복선이었을까.


휠체어부터 시작하여 그의 금반지를 비추고 그의 얼굴을 카메라가 비췄다. 영화 안에 흐르던 내레이션이 어느덧 프랭크의 이야기로 육화(肉化)하는 순간, 영화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으로 갑작스레 넘어간다. 러셀 버팔리노의 딸이 치르는 결혼식에 프랭크 부부가 참석하는 대목에서 영화의 원래 제목이 한 단어 씩 끊어서 나오는 장면을 뒤로한 채, 프랭크는 러셀과 처음 만난 주유소 딸린 휴게소를 보면서 회상에 젖는다.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와 모습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영화는 다시 프랭크의 청년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부터 전개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가히 갱스터가 저지를 수 있는 범죄와 실수와 정(?)의 대서사시였다. 가게 주인을 때려눕히는 프랭크의 모습이나, 두 개의 권총을 신중하게 고르면서도 일정한 간격과 포인트를 유지하는 프랭크의 습관은 마치 충실한 공무원과 성질머리 있는 불량배의 중간 사이에 어딘가에서 제 갈길을 묵묵히 가는 것 싶었다.


영화는 거기에 대해 어떤 옹호나 반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지시가 은유의 대화로 이뤄져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발소에서 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신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이발소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들의 뒷모습만을 비춘 채 바로 옆에 있는 꽃가게의 꽃으로 넘어가 꽃이 활짝 핀 광경을 클로즈업한다. 음악은 브라스 파트를 강조하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총소리는 그 뒤에 일어난다. 러셀 버팔리노가 표현하는 은유적인 언어(말하자면 지시)를 카메라는 이와 같은 기법으로 표현한다.


지미 호파의 죽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영화는 은유를 거두고 상황에 집중한다. 프랭크가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영화는 지금까지 사용한 은유를 구태여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 은유에 충분히 학습된 상태여서, 그가 차에 탄 모습마저도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지미 호파의 죽음은 직접적이고, 훤히 보여준다. 또한 어떤 음악도 없다. (시점 샷을 통해 아무도 없는 방을 보여주는 구도는 어쩜 그리도『좋은 친구들』을 닮았는지.)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이후의 장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할 일을 다 했음에도 살아있는 그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았고, 양로원에서조차 그저 늙어가는 할아버지 취급을 받았으며, 그와 러셀의 육체 또한 세월에 마모되어 더 이상 쓸모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는 여전히 비밀을 조사원들에게 털어놓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관을 직접 알아봐야 할 정도로 아무런 연고 없는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죽음을 가까이 두어도 결국 살아남은 사람의 권태와 무기력과 노화가 이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점을 영화는 후반부의 긴 분량을 통해 증명해 줬다. 갑작스럽게 그의 인생 앞에 등장한 폭력은 그가 스스로 받으면서 아름답다고 여긴 반지처럼 끼워진 채, 그의 손가락에 가죽과 뼈만 남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의 중간, 지미 호파와 춤을 추면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딸의 시선을 받는 그의 서글픈 시선은 아마도 이를 위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의 일과 그를 아무도 추억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늙어도, 문을 열고 자는 호파의 습관이 핏자국처럼 묻은 그는 결코 그 일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문을 열었지만, 카메라는 문 틈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그를 잠시 보여주다가 끝난다. 우리는 그렇게 가는 것이다. 삶을 추억 속에 가둔 채로.


특수효과로 인해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은 젊어졌지만, 그의 몸짓은 그가 늙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 실수가 되려 영화의 복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감독 자신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내게 조 페시와 드 니로의 몸짓은 그들이 곧 늙을 사람이라는 복선으로 비쳤으니까. 알 파치노가 좀 더 젊었더라면 이 ‘가설’도 제법 쓸모가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이건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지루함을 못 이기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배는 안 고팠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오후의 햇빛이 이제 점점 기울어 신촌 역 광장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였다. 노을빛으로 물든 흐린 하늘을 보며 나는 그가 딸에게 비춘 서글픈 눈빛을 떠올렸다.(202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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