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0-70-89
치욕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한 한국산 앨범이 있을까. 게다가 이 앨범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치욕의 시간 속에 머무는, 저주받은 세상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조윤석의 베이스 연주 솜씨가 매력적인 「치질」도, 김정찬의 그루브 넘치는 드럼 연주가 인상적인 「Sam」도, 전부 ‘화장실’에서 세상을 저주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트레몰로 주법의 기타 연주와 슬라이딩 기타 연주가 스트로크 주법의 기타 연주와 어우러져, 애수 어린 봄의 서정을 표현한 「진달래 타이머」도 이 스탠스를 유지했다. 이 앨범의 (90년대의 한국 모던 록 장르를 표방한 음악에 공통적으로 드러났던) 소위 ‘못난이 콤플렉스’는 이런 아름다운 치욕과 맞닿아있었기에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이 앨범의 서정을 한층 더 쨍하게 강조했다.
「송시」의 훅을 ‘긁는’ 일렉트릭 기타의 리듬 기타 연주가 대변하듯, 미선이 또한 홍대 앞에서 활약했던 밴드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록'밴드였다. (이들 또한 밴드 초창기엔 펑크 곡도 꽤 많이 썼다. 김정현이 구사한 ‘마칭 리듬’ 드럼 연주에,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살짝 얹은 「섬」의 사운드에서 그 흔적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은 곧 서로의 사정에 의해 흩어졌다. 그렇게 기타와 보컬을 맡은 조윤석과 드럼을 맡은 김정현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조윤석이 작곡한 곡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윤석과 김정현은 프로듀서이자 음반사 대표인 고기모를 데리고 함께 이 앨범 전체를 녹음했다. (김정현의 형 김정찬이 객원 래퍼로 참여하여 이 앨범의 수록곡인 「두번째 세상」의 랩을 짓고 불렀다.) 김정현은 이 앨범에서 드럼 연주만을 맡았다. 조윤석은 이 앨범에 등장하는 나머지 악기를 거의 혼자서 다 연주했다. (「두번째 세상」의 베이스 연주만 당시 밴드 앤의 베이시스트였던 최민수가 담당했다.)
훗날 루시드 폴로 이름을 바꿀 조윤석의 독특한 가사는 이미 이때부터 기존의 한국 대중음악이 잘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을 많이 구사하기 시작했다. 창법을 달리해 「Sam」의 간절한 의문문(‘나를 미워하세요? 나를 싫어하세요?’)을 애처로운 명령문(‘나를 좋아하세요’)으로 바꿨던 그의 언어 감각은 이미 이때부터 날카로웠다.
「두 번째 세상」은 앨범 전체의 일관성과는 동떨어진 (훵크 록의) 랩 트랙이었지만, 묘한 지점에서 앨범의 주된 정서와 맞닿아있다. 분노 또한 치욕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이들은 잘 알았다. 또한 이들은 아무리 세상에 저주를 퍼부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아니, 달라지는 게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이들은 이 앨범에 자신들이 받은 치욕의 열병을 노골적으로 다 적은 게 아닐까. 「Shalom」의 (분노를 담은) 기도는 바로 이런 맥락과 더불어 생각할 때 더욱 독특한 존재감으로 발(發)한다.
진달래가 수없이 피고 져도, 열병은 늘 마음속 깊은 자리에 남아 상처를 더욱 곪게 한다. 이 앨범의 열병은 누구나 다녀갔고, 누구나 올 수 있기에 치명적이다. 청춘은 기실 허무를 기호품처럼 탐닉하는 시기이지만, 바로 그 시기로 인해, 우리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어른인 척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잊는다. 이 앨범은 바로 그 점을 잊은 채로 썩지 않기 위해 (하루가 두 번의 12시를 지나치듯) 두 번의「Drifting」을 거치며, 치욕의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듯하다. 한 번은 못내 간원(懇願)하며. 한 번은 끝내 부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