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0-88-43
이 앨범에서 세 사람은 각각 세 곡씩을 만들거나 주도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저마다 하나의 연주곡과 두 개의 노래를 만들었다. 박성식이 커버한 (성가인) 이 앨범의 「Beautiful」은 박성식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한경훈이 만든 「슬픈 인형」은 한경훈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장기호가 작곡한 노래는 모두 장기호가 리드 보컬을 맡았다. 마지막 노래인 (박성식이 만든) 「내겐 노래있어」는 멤버 전체가 돌아가며 노래하다가 결국 멤버 모두가 합창한다. 한경훈이 만든 「돌아와 줘」에선 장기호의 목소리가 가장 잘 들린다.
한경훈의 곡과 이들의 연주곡을 제외한 이 앨범의 모든 ‘노래’는 기발표곡이다. 「샴푸의 요정」은 동명의 단막극을 위해 장기호가 만든 곡이었다. 「내겐 노래있어」는 박성식이 (장기호와 같이 참여했던) 사랑과 평화의 4집 앨범에 먼저 들어갔던 곡이었다. 이들은 이 두 곡을 이 앨범을 위해 (이 앨범의 레코딩 프로세스를 이 두 곡에도 일괄적으로 적용하며) 새로 녹음했다.
이들은 키보드를 미디 시퀀서에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 앨범의 수록곡에 있는 모든 리듬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사실상 구획화했다. 그러나 이 ‘프로세스’만으로는 이 앨범의 ‘깔끔한’ 미감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앨범을 녹음할 때, 미디 시퀀서가 제 역할을 분명히 한건 사실이었지만, 이는 화성, 코드 워크, 선법에 대한 이들의 지적인 이해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샴푸의 요정」 후반부의 독특한 조바꿈에 등장하는 신스 솔로 연주나, (「샴푸의 요정」과 더불어 훌륭한 곡 중 하나인) 「그대 떠난 뒤」의 간주에 (기타 연주에 등장하는) 다양한 코드 워크는, 재즈 코드나 화성에 대한 이들의 높은 안목을 증명한다. (연주곡 「그대 떠난 뒤」에서도 이와 같은 세밀하고 화성과 선법이 ‘반짝거리는’ 기타 연주가 들린다.) 한경훈이 만든 「슬픈 인형」은 어반 R&B의 성격을 묘하게 결합한 방식이 이채롭다. 「돌아와 줘」는 세 사람의 출중한 연주 실력(특히나 한경훈의 후주 기타 솔로 연주가 일품이다)을 모두 만끽할 수 있다. 「Beautiful」에서 인트로와 보컬 멜로디를 잇는 박성식의 편곡은 간결하고 효과적이다. 「아침」의 초반을 수놓은 박성식의 피아노 연주와, (한경훈이 만든 연주곡) 「그녀를 위해」에서 섬세하게 코드를 짚는 한경훈의 기타 연주는 맛깔나기 이를 데 없다.
장기호는 (자신이 만든 연주곡) 「빛, 1990」이나 (박성식이 만든 연주곡) 「아침」에 베이스 탭핑 솔로 연주를 넣으며 자신의 테크니컬 한 베이스 연주 실력을 이 앨범에서 확실히 증명했다. 이 앨범에서 비로소 제 진가를 드러내며 만개한 「샴푸의 요정」에서 그는 절제력 있는 베이스 연주로 한경훈의 리듬 기타 연주와 박성식의 신디사이저 연주가 주는 독특한 질감을 살렸다. (또한 그는 「돌아와 줘」의 간주를 베이스 코드 워크로만 채우는 ‘겸양’도 발휘했다.) (바이브레이션을 쓰지 않은,) 선법의 독특한 표현에 충실한 장기호의 보컬은 (사랑과 평화 앨범에 들어간 「샴푸의 요정」에 비해) 베이스 사운드를 절제한 이 버전에서 더욱 훌륭하게 들린다.
세 사람의 묘한 균형감각과 역량과 겸양으로 가득한 이 앨범은, 대중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밀한 감정의 잔근육이 돋우는 ‘총명한’ 감흥으로 가득 차 있다.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연하며, 삿된 것 하나 없이 활기차서 되레 그윽한 ‘아침’의 음악이 이 한 장의 앨범에 오롯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