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0-50-42
한국 대중음악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세 ‘열병’이 있다. 하나는 루시드 폴이 앓았던 『Lucid fall』(2001)과 『Drifting』(1998)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조덕배의 (초기작에 자주 드러나는) ‘열병’이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이영훈의 ‘열병’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앓았기에 이토록 많은 곡을 만들었을까. (그는 그의 걸작을 이미 학창 시절서부터 만들었다.) 그의 ‘열병’은 기존의 한국 대중음악이 감히 꿈꿀 수 없었던 격조 높은 낭만으로 가득했다. 이 앨범은 바로 그 이영훈의 열병이 당대의 ‘명인’인 김명곤의 세심한 손길을 거쳐, 이문세의 격조 있는 ‘보컬’을 타며 찬란하게 꽃핀 앨범이었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의 애써 가지런한 울분을 「붉은 노을」에서 마음껏 토해내는 김명곤의 신디사이저 연주와 편곡은 (순차진행을 즐겨 사용하는 이영훈의 차근차근한) 곡에 딱 맞는 사운드를 입히며 곡이 지닌 감정의 기반을 꼼꼼히 정지(整地)했다. 「끝의 시작」이나 「안개꽃 추억으로」에서 절정의 보컬 기량을 증명한 이문세는 템포가 상대적으로 빠른 「붉은 노을」에서 도리어 자신의 보컬을 절제하며, 곡의 풍성한 사운드를 더욱 강조했다. 울분과 울분 자체의 풍경을 한꺼번에 포착하려 한, (이 앨범에서 특히 드러나는 다이내믹한 멜로디와 잘 어우러진) 세 사람의 멋진 음악적 선택이 이 한 곡 안에서 빛난다.
이 앨범은 특히나 이영훈이 ‘심혈을 기울여’ 쓴 (그래서 합성어가 많이 등장하는) 가사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쓴 가사는 (그가 자의적으로 ‘설계’한 로직에 따른) 주관적이고도 감정적인 독백이 많이 등장한다. 이 앨범에선 그 독백이 많이 ‘흔들린다’. 「기억의 초상」은 상대방을 부를 때 ‘그대’와 ‘너’를 동시에 썼다. 「시를 위한 詩」의 가사는 상대 높임법인 ‘해요’로 일관하지만 중간중간 ‘그대의 꽃잎(별들)도 띄울게’라는 가사도 나온다. 「안개꽃 추억으로」의 훅에 등장하는 모든 가사는 전부 ‘것을’으로 끝난다. 이 앨범은 이 ‘흔들리는’ 가사를 음악적으로 반영한 듯이 들린다. 재즈 풍의 「기억의 초상」에서 ‘그대’와 ‘너’는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을 절절히 반영하는 듯이 들린다. 「시를 위한 詩」에서 ‘띄울게’를 표현하는 이문세의 보컬은 훅의 격정과 벌스의 격조를 체념의 감정으로 가만히 엮는 듯 들린다. 「안개꽃 추억으로」의 훅에서 이문세의 보컬은 ‘것을’이라는 단어를 애써 울음을 삼키는 듯이 곱씹어 절규하며 쓰라린 추억의 허무함을 되레 강조한 듯이 들린다. 이 앨범의 가사는 이 앨범이 지극히 사적인 노래로 채워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 들린다. 남들이 관습적인 일인칭 가사로 ‘정석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동안, 이영훈은 개인적인 일인칭 가사로 이문세의 보컬에 지문을 부여했다.
이 앨범의 「광화문 연가」가 유달리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한없이 뒤채는 이 앨범의 곡들 중에서 유달리 정적인 곡이기 때문이다. ‘눈 쌓인 예배당’을 ‘세월에 사라지는 사람들’과 대비한 이영훈의 음악적 표현은 사랑이 결국 인생이라는 맥락 속에 깃들었다는 사실을 운치 있게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늘 오고 가지만, 인생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는다는 의미일까.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영훈이 휩쓸리는 피동의 삶 속에서 오직 능동의 사랑이 우리를 사람답게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안 ‘작가’라는 사실을 통감한다. 인생이란 나무에 피고 지는 사랑의 드라마를 그는 (그게 고통이 뒤따르는 일임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껴안았다. 소년의 열병을 어른의 사랑으로 훌륭히 키운 그의 애티튜드가 이 앨범 안에서 오롯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