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27-17-12
이 앨범의 작사, 작곡, 편곡 및 프로듀싱까지 맡은 스물한 살의 김현철은 이 앨범의 건반악기 연주 또한 맡으며 이 앨범의 사운드를 꼼꼼히 챙겼다. 김희현이 퍼커션과 드럼을, 함춘호가 기타를, 조동익이 베이스를, 손진태가 일렉트릭 기타를, (『어떤날 I 1960 · 1965』(1986)에서 플루트 연주를 맡은) 오세숙이 플루트를, (훗날의 ‘거장’인) 장필순, (김현철의 곡을 최초로 취입한) 박학기, 윤영로가 코러스를, (동아기획에서 만든 앨범을 거의 전담했던) 송형헌이 (김현철 또한 직접 관여한) 믹싱과, 레코딩 엔지니어를 맡은 이 앨범은 노련한 연주와 풋풋한 (약간 허세가 섞인) 감수성이 세밀한 사운드로 한데 어우러졌다.
김희현의 퍼커션 연주로 표현한 (보사노바를 머금은) 「춘천 가는 기차」의 ‘기차 운행 소리’는 정교하고 정갈하다. 이 곡에서 등장하는 오세숙의 청명한 플루트 연주는 나긋나긋 노래하는 김현철의 보컬에 앞서 한층 운치 있는 여운을 곁들였다. 「눈이 오는 날이면」이나 「동네」에서 김현철이 직접 연주한 신디사이저 연주나, (조동익의 베이스 연주가 참으로 쏠쏠하게 들리는) 「나의 그대는」에서 역시 그가 직접 연주한 각종 건반 악기 연주는 그가 당대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키보디스트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오랜만에」의 인트로나 「눈이 오는 날이면」에서, 신디사이저 연주로 혼 섹션 사운드를 구현한 대목은 훗날의 그가 본격적으로 구현할 정교한 혼 섹션 사운드에 대한 ‘예고편’을 듣는 것 같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일에 유달리 예민한 감수성을 함유한 이 앨범의 수록곡은 당대의 청춘이 지녔던 (약간의 허세가 말과 음악에 담긴) 낭만주의적이고도 낙천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소리로 구현했다. 「오랜만에」의 간주에 흐르는 함춘호의 기타 솔로 연주는 밝은 느낌 속에서도 그리움(에 애수 한 줌)을 곁들이는 이 앨범의 감수성을 연주로 잘 대표했다. 이 앨범에서 가장 대범한 어프로치를 취한 걸작 「동네」에서도 (드럼과 카우벨을 비롯한 퍼커션을 동시에 구사하는 김희현의 연주가 해당 곡에 상쾌한 뉘앙스를 더했기에) 김현철의 이런 ‘낙천주의’가 빛을 발했다. 퓨전 재즈나 시티 팝(City pop) 같은 장르를 이 앨범의 모든 수록곡에 붙이는 일이 사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미숙했던 보컬을 기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완벽히 보충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여전히 싱싱하다.
이 앨범의 수록곡은 소년 시절의 그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은 그가 긴밀하게 손을 맞잡고 있었기 때문에 독특한 신선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동네」의 정겨운 회상은 곧장 「춘천 가는 기차」의 유려한 회상과 이어졌고, 「아침 향기」의 떨림 가득한 목소리는 곧바로 「형」의 (존경심 어린 경애를 담았기에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나아갔다. 이 앨범에서 그는 ‘짧지 않은 스무 살’을 노래하는 목소리로 ‘내 취한 모습도 좋겠’다고 노래하며 ‘나를 비웃는 가로등의 고독한 미소’를 지시했다. 자신의 허세마저도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젊음’을 이 앨범은 생생하게 담았다.
한해의 첫머리에 내린 비를 축복으로 여겼던 화자의 모습과 화자를 둘러싼 풍경을 그는 이 앨범에 다 담았다. 추억은 으레 그런 넉넉한 마음을 통해 잊을 수 없는 행복으로 남는다. 이 앨범은 우리가 겪지 않은 행복한 추억까지 우리에게 한 아름 안기길 지금도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