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49-15-11
「스파이더맨」의 인트로에 나오는 김영석의 드럼 연주서부터 이 앨범의 사운드는 표변한다. (조동익의 베이스 연주가 은은한) 「첫사랑」과 (박용준의 신디사이저 스트링 연주가 훌륭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가 추억의 ‘원형’을 은은하면서도 확실하게 드러냈다면, 「스파이더맨」 이후에 등장하는 이 앨범의 나머지 곡 (공교롭게도 여기엔 장필순이 만든 곡 또한 들어가 있다.)은 건반 악기 연주를 없앤, 도회적인 성격을 보다 ‘직접’ 머금은 곡으로 가득하다.
장필순의 ‘건조’한 목소리는 도회적인 성격을 지닌 수록곡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졌다. 함춘호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장필순의 목소리만 등장하는 「풍선」에서 장필순은 자신의 건조한 목소리를 더욱 강조하여 곡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었다.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의 매끄러운 연주는 그이의 건조한 목소리 덕분에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자전거처럼 (재밌게) 덜컹거린다. 「TV, 돼지, 벌레」의 훅(Hook)은 그이의 (이펙터를 걸쳐서 더욱) 거친 목소리 덕분에 (욕망에 대한) 곡의 조소가 더 잘 드러났다. 나긋나긋한 멜로디로 인생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노래한 「그래!」를 통해 장필순은 거친 목소리로 (외로움을 인정하는) 다정한 체념을 자장가 부르듯이 노래했다. (김영석의 드럼 연주와 함춘호의 기타 연주, 조동익의 부지런한 베이스 연주가 리드미컬하게 어우러진) 「그녀에 관한 짧은 얘기」는 그이의 보컬과 이한철의 코러스로 인해 더욱 록킹한 사운드로 거듭났다. (이 와중에도 그이의 목소리는 이 곡의 관조적인 감정을 잘 표현했다.) 함춘호의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하는) 리듬 기타 연주 솜씨가 빛나는 「넌 항상」의 ‘조언’은 거친 장필순의 목소리로 인해 도리어 호탕하게 들린다. (이 곡에서 ‘미더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이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걱정’하는 이 곡 후반부의 말에 훌륭한 당위성을 부여했다.) 사색적이고, 깊고, 대범한 장필순의 보컬은 (밴드 연주와 함께) 이 앨범의 사운드를 (포크를 기반 삼은) 모던 록의 전압으로 가득 채웠다. 당대에 소위 ‘모던 록’을 표방한 밴드들이 미처 구사하지 못한 감정적인 ‘깊이’를 그이는 목소리로도 구현했다.
물론 이 앨범의 베이스 세션도 겸한 조동익 또한 앨범 후반부에서 맹활약했다. 「이곳에 오면」의 플랫리스 베이스 연주도, 「넌 항상」의 보컬 멜로디에 충실한 베이스 연주도 능숙하게 소화한 그는 (이 앨범에서 특히나) 베이스의 표현력과 곡의 무드를 한꺼번에 획득하는 연주를 구사했다. 김영석은 단순한 비트로 된 「사랑해봐도」에서도, 산뜻하기 이를 데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고른 드럼 연주를 구사하며 이 앨범의 리듬 파트를 견인했다. (함춘호 또한 「사랑해봐도」와 같은 단순한 곡에서도 훌륭한 기타 연주를 구사했다.) 듣기는 수월하나, 만들기는 어려운 이 앨범의 사운드는 지금 들어도 비범하기 이를 데 없다.
(관조적이면서도 거친 목소리가, 노련한 록 밴드 사운드와 만나는 과정 속에서 ‘장필순’이란 사람이 오롯하게 드러난) 이 앨범을 통해 뮤지션 장필순은 마침내 ‘자립’에 성공했다. (앨범 후반부에서 유일하게 조동익이 작곡한) 「사랑해봐도」나, (그윽하니 관조적인) 「이곳에 오면」의 관조를 거쳐, (산뜻한 사운드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로 끝나는 이 앨범은 삶이 슬픔 못지않게 기쁨도 가득하다는 사실을 청자에게 일깨워준다. 있는 그대로 살아야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 앨범은 바로 그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인해 지금의 일상과도 잘 어우러진다. 조소(嘲笑)를 미소로 바꾸는 힘을 이 앨범은 여전히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