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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Jul 18. 2024

이제야, 이세야[伊勢家] 식당

7월 18일

  요도바시[淀橋] 시장에 가려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신주쿠[新宿] 역에 갔다. 귀국날이었다. 어머니는 마저 주무셨다. 스웨트 팬츠와 스웨트 셔츠, 경량 패딩 차림으로 나섰다. 여행 내내 신은 길이 잘 든 운동화가 내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 줬다.     

     

  하늘색 옷을 입은 청소부가 거리를 청소하는 동안, 사람 팔 길이보다 약간 작은 까마귀가 낮게 날아올랐다.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곳을 봤다. 양복을 입은 아저씨는 시계와 신호등을 번갈아 쳐다봤다. 감은 눈에 졸음을 미처 털지 못한 붉은 코트 차림의 여성은 하늘 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핸드폰을 보는 남자는 지나가는 택시가 흩뿌리는 바람에 긴 머리가 흩날렸다.

     

  건너편 빌딩의 전광판에선 오늘의 날씨에 이어 콘서트 예고 영상이 흘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와중에 광고는 축구 경기 광고로 바뀌었다. 남색 하늘의 동쪽 끝은 울트라마린 빛으로 물들었다. 비비드 옐로 빛으로 물든 가로등 불빛과 약간의 초록빛으로 물든 공사장 형광등 불빛이 아직은 더 밝은 시간이었다.

     

  마츠모토 키요시(マツモトキヨシ)와 '샐러드 우동'으로 유명한 산고쿠이치[三国一]의 간판을 눈여겨보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밤의 어두운 기운은 거리 곳곳에 채 다 물러가지 않았으며, 제대로 연 가게라곤 편의점 밖에 없었다.  

    

  JR 신주쿠[新宿] 역 동쪽 출구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팔짱을 낀 채로 종종걸음 쳤다. 나는 신주쿠[新宿] 알타 빌딩을 쳐다봤다. 검은 전광판에도 점점 푸른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불빛이 밝은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했다. 개찰구를 통과하는 길에 하품이 나왔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중년의 아저씨가 내 곁을 지나치며 나리타[成田] 익스프레스를 탈 수 있는 플랫폼 쪽으로 달려갔다.  

    

  오쿠보[大久保] 역으로 가려면 츄오[中央] 본선을 이용해야 했다. 신주쿠[新宿]  바로 다음 역이라 각역정차(各駅停車 : 역마다 들르는 열차) 열차로도 충분히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겁이 났다. 앱에 뜬 정보가 내 등을 떠밀었다.


  열차를 타기 위해선 16번 플랫폼으로 가야 했고 나는 1번 플랫폼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나는 잰걸음으로 역을 가로질렀다. 뛰어가는 사람이나,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들이 마치 나이프로 뭉갠 유화물감 덩어리처럼 보였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플랫폼 지붕 너머로 건물이 보였지만, 아직은 전등 불빛이 더 강하게 플랫폼을 적셨다.


  나는 열차에 몸을 싣고 빈자리를 차지했다. 앉는다는 느낌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파묻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에 흐르는 건물들이 서서히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나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걷는 쪽으로 걸어갔다. 에스컬레이터 발판이 생각보다 더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개찰구를 나왔다. 입구 옆에 이발소가 있었다. 이발소 의자는 어두운 그림자를 잔뜩 머금은 채로 주인을 기다렸다.      


  거리를 걷는 내내 하늘은 제법 밝아졌고, 가로등 불빛 또한 점차 밝기를 잃었다. 이따금 전조등 불빛이 푸른 아스팔트 도로를 잠시 스쳤을 뿐이었다.


  시장 입구에 이르러서야 나는 잰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땀으로 인해 러닝셔츠가 몸에 들러붙었다. 경비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요도바시[淀橋] 시장은 야채 전문 도매시장이었다. 사과가 담긴 상자와 초록색 모자를 쓴 도매상들, 야채 상자를 나르는 지게차를 지나쳤다. 이세야[伊勢家] 식당에서 몇 사람의 일행이 문을 열고 나왔다.


  『고독한 미식가』 가 아니었으면 이 식당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식당 주위는 아직 푸른빛이 걷히지 않았고, 식당을 나온 사람들은 중국어로 수다를 떨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처음 갔을 때 시장 전체가 휴일인 걸 알고 얼마나 슬펐던가. 그때 못 간 식당을 나는 코로나가 잦아든 해가 돼서야 겨우 당도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문을 살폈다. 각종 안내문구가 불투명한 유리 미닫이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노렌[暖簾]의 한 귀퉁이를 한 손으로 걷으며 나는 문을 열었다.      


  나이 지긋한 여주인과 부엌 안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근처에서 일하는 듯한 아저씨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내 쪽을 향해 등 돌린 채로 앉아 밥을 먹고 있었기에 그 아저씨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여주인 또한 부엌 쪽을 계속 바라봤다.


   나는 아저씨가 앉은 테이블을 피해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으니, 정수기가 바로 있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가 이렇게 편할 일이 있나 싶었다. 나는 벗은 코트를 대충 접어 있는 의자 위에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반대편 벽에 가로로 길게 놓은 거울이 내 얼굴을 비췄다. 나는 괜스레 턱을 만지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다행히도 멀끔한 얼굴이었다.      


  메뉴판을 받았지만 주문할 메뉴는 이미 정해놨다. 나는 쇼가야키[生姜焼き:돼지고기 생강구이] 정식을 시켰다. 밥은 그냥 보통 양으로 시켰다. 밥과 반찬은 그대로 왔고, 만가닥버섯이 든 된장국도 금세 나왔다.

  

  주인은 다양한 츠케모노(つけもの:절임 채소)가 담긴 여러 개의 종지를 쟁반 하나에 다 담아서 내 쪽으로 들고 왔다. 나는 무와 오이가 있는 츠케모노를 골랐다.      


  마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생강이 들어간 듯한 맛이 나는 쇼가야키[生姜焼き]를 한동안 음미하면서, 나는 여주인과 남자 손님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선 팝송을 배워야 하는 질문을 여주인이  남자 손님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여주인은 그 대답에 자신이 옛날에 밴드를 했었다는 사실을 뜬금없이 고백했다. 놀란 손님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비틀스를 주로 커버했다는 게 여주인 대답이었다.      


  남자 손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접시에 남은 양배추 슬라이스를 마저 즐겼고, 생강 향이 있는 육즙에 절여진 양배추는 그 자체로도 맛있었다.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五郎]가 맛있게 먹었던 것을 나 또한 즐길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식사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여주인에게 가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조심스레 여쭤봤다. 자신의 얼굴을 제외하면 어디든 찍어도 된다고 여주인이 내게 대답했다. 나는 내 핸드폰 소리에 살짝 놀라면서 식당의 모습을 두어 컷 찍었다.


  여주인은 내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봤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놀라셨고, 오늘이 귀국일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놀라셨다. 언젠가 다시 한번 오겠다는 말과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건네며 나는 식당 밖을 나섰다.


  식당 옆에 여닫이문이 있었다. 문을 열면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올라가면 곧바로 인도가 나왔다.

  

  새해 인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나는 왜 구태여 여주에게 한 걸까. 괜스레 부끄러워서 오쿠보[大久保] 역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건널목 저편, 문 닫힌 대형 마트 안에서 두건과 앞치마를 쓴 아줌마가 대걸레로 가게 바닥을 닦았다.      


  오쿠보[大久保] 역의 에스컬레이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올라가는 방향이었다. 손잡이에 햇살이 번들거렸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살이 플랫폼 바닥을 적셨다. 바람이 불고, 자동차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새들이 지저귀었다.


  그 뒤로도 나는 귀국할 때까지 많은 음식을 즐겼지만, 여행의 아쉬움과 새벽의 설렘이 한데 겹친 이 한 끼의 식사가 여행 내내 먹은 음식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다. 따뜻한 음식은 그렇게 특별한 시간과 만나 진수성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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