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 영화『길버트 그레이프』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 앞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있다. 갓 지은 아파트 상가에는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두 개가 붙어있었다. A4 용지로 가지런히 붙인 가격이나 상담 환영이라는 글씨가 유리창에 붙어있었다. 상가는 크게 세 가지 패턴이 있는 듯하다.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먼저 들어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빠지면, 편집샵이나, 동네 빵집을 비롯한 일반 자영업자의 가게가 들어온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상가는 체인점이나 가맹점, 혹은 편의점이 들어선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상가마다 하나씩은 있다.
야구가 홈 베이스로 나가서 돌아오는 게임이라면, 바둑은 바둑판에 돌을 놓아서 집을 지키는 영토 싸움이다. 둘 다 다섯 시간 이상 하는 경기라는 점 또한 비슷하지만,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야구와 바둑은 엄연히 다른 게임이고, 그 차이를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가끔씩 이들 게임을 눈여겨보면서, 집에 대해 상상한다.
동굴 속에 살던 인간이 집을 짓고 살 수 있게 된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갈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유지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니까. 가장의 무게는 실은 집의 무게를 더한 값이라는 점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살기 위한 집을 얻기 위해, 돈 벌어다 주는 집이 한데 얽힌 틈바구니를 주머니칼로 헤집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 친구의 말에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세 대출이나, 이자율을 생각하고, 관리비를 생각하고, 주민세를 생각하고, 소득세를 생각하는 동안, 집값은 오르고 오르고 계속해서 떨어질 줄 모른다. 차라리 내 집 값이라도 올랐으면 좋지만,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저 멀리 아파트는 몇 배가 뛰었다는 말에 더 구미가 당기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마다 내가 나를 얼마나 경멸하고 싶던지.
카페에서 컴퓨터를 오래 쓰는 사람이 문제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카페가 자릿세를 커피값으로 받는 곳이라는 글을 떠올린다. 카페에선 적어도 밀린 월세와 주문하지 않은 커피값은 동일한 말이었다. 나 또한 글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어느 남자가 내 글을 보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고, 나는 그 뒤로 다시는 글을 쓰러 카페에 가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첨삭을 받으려고 간 게 아니라, 혼자서 몰입하기 위해 카페를 갔는데 그 아저씨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사람처럼 자신의 인생(“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이 10권은 나올 거야.”)과 자신의 예술(“이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작가를 한다고.”)을 뽐냈다.
도서관에서 쓴 글을 집에서 읽을 때, 나는 거기서 쓴 거의 모든 글을 서랍에 넣어뒀다. 들뜬 목소리로 일관된 글은 자그마한 일에도 지나치게 감탄하고, 지나치게 울고,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인상파 화가들은 밖에서 모든 일을 했지만, 검은색 약간 밖에 쓰지 않는 나는 그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집에 대한 생각은 마치 육중한 서까래가 되어 천장을 짓누른다.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도 예민해질 밤이면, 그 생각은 더 한다. 왠지 엎어진 종이 상자처럼 밑에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금세 엎어질 듯하다. 길 위의 생을 동경하는 이유는 우리가 집 위의 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달팽이를 봤다. 봉분과 똑같이 생긴 달팽이 등껍질을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은 결국 같은 집에 머무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몇 년 뒤,『길버트 그레이프』란 영화에서 결국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머니가 집과 더불어 화장된 장면을 보고 나서 실컷 울은 이유는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머니가 매우 불쌍해 보였던 탓도 있었지만, 집에 대하여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머니가 한 말과 행동이 이 지극히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죽어서도 집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유의 지옥에서 집을 생각하는 일은 내가 가진 존재 그 자체를 살피며 사유하는 일일테다. 돈을 위한 향상심이 모든 향상심의 전부일까. 자기 인생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정확하게 매길 수 있기에, 그들은 집을 돈으로 볼까.
질문이 쌓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밥 딜런이 노래한 대로 어쩌면 답은 저 바람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