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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r 11. 2022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잊고 있던 초심을 상기하며

2022년 3월부로 어느덧 민원실 근무 2년 차가 되었다.(정확히는 1년 하고도 1개월이 갓 넘었지만) 이제는 제법 타서에서 업무 관련 문의전화를 받기도 하고 일의 경중을 따져 처리 순서를 조절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 나서는 수준 정도는 된 것 같다. 선생님, 어르신, 학생 등 때에 따라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민원인을 상대하며 처음에는 업무 미숙으로 진땀 빼는 일도 참 많았었다.


업무 외적으로도 망자의 서류를 떼러 온 유족에게 기계적으로 본인이시냐고 물었던 무례했던 순간, 체구나 목소리, 앳된 얼굴의 외형만 보고 성별을 착각해서 형제끼리 온 학생들을 남매 취급했던 일, 면허증 발급 신청을 하면서 깜빡하고 지갑을 안 가져왔다는 말에 면허증 수령할 때 수납하시라고 했다가 일주일 새 나는 그런 적 없다며 안면을 바꾸는 바람에 비는 수수료를 사비로 채워 넣었던 기억, 치매로 인해 면허가 취소됐으나 인정을 못하고 며칠 동안 담당자(나)를 찾으며 아침일찍부터 민원실에 와서 고함지르던 노인 등. 나의 실수였건 민원인 개인의 문제였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많이 들다 보니 사람 상대하는 일 자체가 권태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감히, 겨우 민원응대 2년 차 주제에.


솔직히 말하면 나의 학창 시절 장래희망란에 단 한 번도 '경찰'이라는 직업이 적힌 적은 없었다.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상자에서 끊임없이 예쁜 물건을 꺼내는 마술사를 진심으로 동경하기도 했었다. 그 후로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나는 매일 보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언급하는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던 것 같다. 특출 난 재능도 끼도 없던 평범한 나는 결국 공무원이 되었으니 장래희망을 이루었다고 봐야 할까.


사실 내가 경찰공무원 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응원보다는 우려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거니와 수험생 생활을 시작할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적지 않은 나이, 그리고 우리 가족의 경찰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고 계신 의경 출신 외삼촌은 군인 시절 이루 말할 수 없는 집단 구타와 모욕스러운 일들을 겪으셨다고 했다. 나도 그런 가혹행위를 당할까 봐 그러셨는지, 아니면 나도 그런 가해자들과 같은 족속이 될 것을 걱정하셨는지, 둘 다 인지 모르겠으나 적극적인 만류까지는 아니었어도 무거운 얼굴로 우려를 표하신 건 사실이다. 또한 뇌성마비가 있는 막둥이가 걸음마를 막 떼던 어린 시절 집안일을 하는 엄마의 눈을 피해 열려있는 문틈을 비집고 나가 맨발로 거리를 활보하다 시민의 신고로 다행히 부모님께 인계가 된 일이 있었는데, 대뜸 경찰이 엄마에게 "아주머니, 애를 길가에 버리시면 어떡합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그날 밤 엄마는 엉엉 소리 내어 우셨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잃어버린 것만 해도 가슴 무너질 일이었는데 그 경찰관은 내 동생을 찾아주면서 우리 엄마의 무너진 마음을 완전히 짓밟고 갔다. 나는 이런 일들을 알고도 경찰을 하겠다고 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더 급하기도 했으나 최소한의 사명감은 가진 경찰이고 싶었다. 적어도 생계형 공무원은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지나다니는 출퇴근길 삼거리에서 내 앞에서 신호등 황색 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고 적색 신호 확인 후 정차를 하고서 무심히 길가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낡은 현수막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도로가에 있는 3층짜리 중화요릿집 건물 외벽 한쪽을 덮을 만큼 큰 현수막이었는데 원래 바탕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바래 있었다. 오랜 시간 비와 바람, 따가운 햇살을 오롯이 감내하느라 군데군데 물이 잔뜩 빠져버린 핑크빛 배경색에 흐릿하지만 큼지막하게 '신장개업'이라는 문구와 하단에 음식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저 정도 헤질 정도면 수년간 그 자리에 걸려있었을 터. 신장개업의 첫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피력인 단순한 업주의 관리 소홀과 태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오랜 시간 걸려있던 낡은 현수막의 존재는 새삼스러운 발견임과 동시에 나의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진 '초심'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처음 발령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전화응대나 다른 업무를 하고 있지 않은 이상 항상 자리에서 일어나 내방한 민원인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가능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고, 이것은 이러해서 그렇다는 부연설명까지 덧붙이려 노력하고 있다. 저것들 철밥통이라 앉아서 놀고먹는다는 비아냥도 듣기 싫고 혹여 불친절하다는 민원으로 내 직장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스스로 세운 원칙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매너리즘에는 빠질 망정, 초심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는 있다. 인생에서 내가 무슨 계급을 달고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상대방이 태어나 처음 마주한 경찰이 나 일수 있다. 그 사람에게 경찰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나마 따듯할 수 있기를.


경찰공무원 수험생 시절. 먼발치에서 지나가는 파란색, 붉은빛 순찰차 경광등만 봐도 가슴이 설레던 때가 있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치러진 요란스러운 대선도 그 막을 내리고, 이제 다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당선이든 낙선이든 선거라는 절차가 끝났을 뿐, 모두에게 다시 다음의 새로운 과정이 시작되었다. 푸른색이든 붉은색이든 처음 마음가짐을 항상 잊지 말고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기 문양처럼 잘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 공정과 정의가 바로선 나라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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