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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피플 May 15. 2016

당신이 어제보다 덜 행복한 이유.


당신은 어제보다 더 행복한가? 아니면 더 불행한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는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어제보다 더 행복한가를 생각하는 순간, 덜 행복해 질 수 밖에 없다. 그에 대한 이유를 깨닫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 잠정적인 형태로 내릴 수 있는 최적의 결론은 바로 그러한 메타포를 어설프게 담은 뭉뜽그려진 텍스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해 본다.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은 현실을 얼마나 대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지나치다 할 만큼 꿈꾸던 장미빛 미래는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 0.5초도 지나지 않아 과거의 반추로 분류된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지금의 나에게 남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직간접적으로 미치면서,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행복의 기준(돈, 명예, 사회적 지위, 개인적인 땀과 열정, 인간적인 관계의 개선, 전인류적인 가치, 그럴듯한 타이틀 그 무엇이라도 좋다. 어느 것도 다 정당하다. 자신의 기준 안에선.)을 적극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유무형의 그 무언가일 것이다. 자, 그래서 지금 더 행복한가?



만약 행복하다고 하면 그것을 다시 떠올려서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로 인해 또 다른 무언가가 실현되어서 그런가? 다시 떠올려서 행복하다면 그것은 이미 지금의 당신과 다르며, 또 다른 무언가가 실현되었다면 또 다른 무언가가 행복의 파라미터가 되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파랑새를 쫓아가던 누군가는 결국 더 행복해 지기 보단, 길을 걷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인간은 선악의 기준보단 관성을 따라가는 존재이다.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을 붙잡은 순간 익숙하게 느끼고, 늘 내가 쥐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수십년간 노력했던 것들은 한 순간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뜬구름 잡는 것으로 치부하고, 현재만 중요하다는 식의 판에 박힌 담론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 조차도 너무나 상투적이여서 입밖으로 내는 순간 공허해 진다. 현재를 더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덜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러한 행복의 기준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도 좋지 않은가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몇 가지 묵직함 중의 하나이다.



가진 것도, 옆에 있는 그 무엇도, 내가 쫓아가는 그 무엇도 결국은 행복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도 취지에서 벗어난다. 결과와 과정 역시 시간의 선후관계를 적당히 다른 언어로 치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해 지고 싶어 노력하던, 더 불행해 지기 싫어서 노력하던 결국 그 무언가는 내 앞의 벽을 허물어가는 과정이고,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과정이며, 세상의 공기를 조금 덜 희박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앞으로 덜 행복해 지지 않는 것에 연연하는 사람의 가장 큰 심리는 내일에 대한 불안과 무언가에 대한 원망이다. 지금의 상태에서 더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싶지 않아 무엇을 해도 쫓기듯 불안할 수 밖에 없고, 가지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꿈이라는 막연함을 쫓아가기 때문에, 즉 현재의 결핍을 인지하는 것을 생각의 출발점으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한국사람은 전체적으로 덜 행복해 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남과 비교를 하기 때문에 내일에 대해 불안한 생각이 들어 한시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대외적으로 그럴 듯한 무언가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 없으니, 현재의 결핍을 에너지 삼아 자꾸 무언가를 구축하고자 한다. 심리적 방어벽을 만들면서 현실적인 성취를 하려 하기 때문에, 성취를 하고 나서도 그 방어벽에 둘러싸여 인생을 즐기지 못하며, 남이 바라보는 그럴 듯한 시선에 또 한 번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나 혼자 있을 땐 무엇이 행복인지 끊임없이 헷갈린다.

전문직이란 수식어는 부를 동반하지 않는 직업엔 얘기하지 못하고, 남이 가지지 못한 생각의 실마리를 찾으면서도 남과 다른 생각으로 손가락질 받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러한 삶의 공기와 사회적 분위기가 70% 이상은 차지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인 것만 같다.



그래서 가장 열심히 사는 것 같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 평일엔 생각의 여유가 없이 주변의 흐름에 맞추어 아둥바둥하고, 주말엔 주변의 흐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나도 모르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버린다. 가진 것만을 떠올리기 때문에 과거에 머물러 있고, 앞으로 해야 할 것만을 불안심리에서 계획하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미래에 귀결되어 있다. 현재라는 건 사실 과거와 미래를 떠올리지 않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란 것을 스스로 박탈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강박, 콤플렉스, 불안, 우울심리, 자괴감, 대인기피 등의 변형적 심리는 어쩌면 나에게 ‘지금’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다시 초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 어제보다 덜 행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린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이런 글 따윈 읽을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진지하게 떠올려 마주하지 않는다.


인정하고 마주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내 삶이 아주 공허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완벽하려 하기 때문에, 남의 눈에 어설퍼 보이기 싫기 때문에,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뭔가 잘못될 것만 같기 때문에 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단 하루라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오늘이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다. 이미 밤이 깊어 단 1시간도 남지 않았더라도 정답은 오늘이다. 오늘의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정면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면을 마주할 때 무엇이 보이는가? 생각의 끝엔 무엇이 숨쉬고 있는가? 지금까지 내가 이 악물고 노력했던 모든 것 중에 진심으로 나를 향해 길의 끝자락에서 기다려 주고 응원해 주는 것은 과연 몇 개나 남아 있는가? 우리가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결국 과거나 미래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하고, 어제나 내일의 시간적 선후관계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설퍼도 살아 있는 한, 단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행복의 기준은 원래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스스로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쫓아왔던 행복의 허울은 소극적인 의미의 행복 카피본이라 생각해도 좋다. 남보다 더 가지기 위해, 덜 쪽팔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기 위해, 순위에서 앞서기 위해, 심리적으로 불안하지 않기 위해 손을 뻗었을 뿐, 아무 것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느 환경에 처해 있던 그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주어진 허들을 착실히 뛰어넘으며 사는 삶이 그렇게 그 사람다워 보이고 부러울 수가 없다. 가난하고 무능력하고 실패를 반복해도 좋다. 자신 앞에 놓인 허들, 때로는 오르막길, 때로는 인생의 벽 앞에서 심장 박동수는 일정한 채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다. 내가 쫓던 그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분명 가슴이 뛰고, 땀을 흘려가며, 밝게 웃고 있었다. 남의 시선으로 불안한 가슴뜀이 아니고, 어제보다 덜 행복한 오늘에 대한 식은 땀이 아니고, 남의 기분에 맞추어 웃고 있는 웃음이 아니였다. 우리도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많은 길을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헐떡거릴 지도 모른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은 또 다른 형태로 성난 이리처럼 달려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로서 완결성을 짓는다. 영화 ‘인셉션’에서 나오는 것처럼 꿈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꿈이 시작되었는 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끝나는 점조차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이고, 밤에 눈을 감으면 끝이다. 그래서 평생 오늘만 살 수가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좋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써가며 고군분투할 필요도 없다.

그냥 오늘만 살면 그걸로 족하다. 그래서 우린 뭐든 지 해볼 수 있다. 오늘 딱 하루만 살면 완결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을 향한 완결성이 아니라, 내면에 솔직한 완결성이다.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면 된다. 잘 안 풀리면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 곱씹을 필요 조차 없다. 얼마나 쿨하고 명쾌한 오늘인가?



조금 황당한 얘기일 지 모르지만 당신이 어제보다 덜 행복한 이유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오늘의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다 허상이고, 비교 개념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갖지 않은 각종 관념을 끌어와서 가장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면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오늘의 주인공을 자처한 셈이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오늘만 떠올린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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