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일어나면 꿈꾸듯이 되뇌이는 마음 속의 외침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좀 더 좋은 일이 많았으면... 나쁜 일은 되도록 일어나지 말았으면..’하고 말이다. 긍정적인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하루에 대한 자기암시이자, 다짐일 수 있다. 충분히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렇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계획한 일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그 계획한 일이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고자 하는 얘깃거리의 결론일 수도 있고, 업무적인 성과일 수 있으며, 인생 전반에 있어서의 큰 틀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뒷면에 깔고 있는 대전제라는 건,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는 좋은 일을 보통 사람들은 ‘운’이라고 부른다.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에는 적지 않게 어색함을 느끼는 게 우리들의 심리적 현 주소가 아닐까 한다.
인생을 큰 틀에서 생각해 보자. 내가 바라던 일들이 예상했던 결론이 나면, 일단 기분이 좋다. 평소에 갖고 있던 상식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다. 자신의 인생 궤도를 무리한 방향으로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칭찬과 주목을 더욱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더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여유가 그 안에 가득한 것을 꿈꾸게 된다. 앞으론 더욱 더 눈에 보이는 현실로서 결과를 인식하고 받아들여도 좋다는 ‘암시가 강화’된다.
자, 하루가 지나갔다. 당신의 인생 전체적인 궤도에서 볼 때, 더 좋은 일이 추가되었으니 더 행복해 졌는가? 더 안심이 되는가? 쉽게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어제 일어났던 좋은 일에 기반하여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이상을 높게 설정하며 그것을 달성하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의 계단이 두 개가 되었을 뿐이며, 나는 여전히 다음 계단을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높이가 좀 더 높아졌으니 사람들이 조금 더 올려다 볼 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른다고 느낀다면, 이 글을 더 읽어도 의미는 없겠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을 논하고자 하는 게, 단상 시리즈의 맥락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가장 쉽게 드러나는 것이 업무적인 성과이다. 올 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업무적 성과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업규모를 확장시켰다는 것일 것이다. 올 해 사업계획을 100이라고 할 때, 두 배 이상의 250을 달성했다고 치자. 내년에 더 행복해 지는가? 아마 200 언저리의 숫자에서 그 두 배 이상을 또 다른 사업계획으로 세우며, 되지도 않은 달성전략으로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리는 고달픈 자신이 있다.
그리고 내년 말이 되어, 올 해의 사업계획 100 대비, 1.5배인 150을 달성하고도 좌절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애써 웃으며 내 주위를 맴돈다. 차라리, 100을 사업계획으로 세우고 110으로 올 해를 끝마치고, 내년에 130을 세워 150을 달성하는 게 똑같은 150이라도 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논리라면 말이다. 2년 뒤에 같은 150인데 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가? 현실을 뛰어넘는 것만 같은 그 무언가가 좋은 일처럼 느껴지면 그것을 적극 수용하는 게 과연 행복해 지는 길인가? 그리고 그러한 일을 내가 얼마만큼 컨트롤 할 수 있는가? 아마 그럴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을 것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심리적인 방어벽을 적당한 선에서 판가름 할 뿐,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내 범위를 처음부터 벗어나는 의미 없는 구분일 뿐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게 아니다. 무언가 도전적으로 인생의 여러 목표를 세우는 것은 동기부여의 측면에서만 봐도 자신을 REFRESH하기 충분하며, 앞으로 속도를 내는 인생은 꽤 유쾌하다.
중요한 건,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균형잡힌 감각’이다.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고 해서 좋은 일이 아니고, 내가 잘 한 게 아니며, 운 좋은 건 더더욱 아니라는 말이다.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나쁜 일인 것인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은가? 운이 지지리도 없는 하루로 오늘을 치부해 버리고, 생각의 끝자리에서 그것을 공중분해 시킬 것인가? 기억에서 지우면 나쁜 일은 사라져 버리는가? 덧없는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좋은 일이란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예상한대로 흘러가는 심리적인 기대치’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반대로 나쁜 일이란 ‘내가 정한 인생의 흐름을 벗어나는 부정적인 전개’이다. 만약 일어난다면 꽤 속상할 것이고, 더 불행해 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심리적 허들을 넘어서느냐 넘어서지 못하냐는 차이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안정을 좋아한다. 불안한 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면 모험’이라고 한다. 그리곤 그 모험이 무언가를 가져다 주면 도전적이라 하고, 무언가를 나에게서 ‘빼앗아가면 무모하다고 한다.’ 무모한 사람을 보면, 아직 어리고 철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 기준 또한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면 무언가를 더 가져다 주는 일도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언제까지 계속할 수 없는 일이라 폄하한다.
그런 억지는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 예전에 다 좋은 일이였을까? 결과가 다 좋아서 지금에 이르렀는가? 당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예전에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가? 10년 전의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의 절반이라도 할 수 있었는가? 지금 인식하는 좋은 일들은 과거엔 나쁜 일은 아니였는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일단 좋은 일로 긍정하는 것인가?
이것은 ‘시간의 패러독스’와도 맞물려 있다. 시간에 따라서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기준이 바뀌기 때문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나쁜 일로 인식하고 피했다가,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꿈을 저버리는 우매함을 범하기 쉽상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나약하다. 얼마나 더 안정을 찾아야 우리는 마음 편히 하루를 마무리할까? 그것은 어찌보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 지도 모른다. 어제 만난 세상은 오늘 바라보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앞으로 갔고, 누군가는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살아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원래부터 없었고, 영역 구분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나의 영역은 좋은 일에만 국한된 현실’일 거라는 생각으로 ‘자기최면’을 걸 것인가? 반쪽 짜리 인생은 언젠가는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오른발을 딛고, 왼발을 딛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좋은 일만 일어나기 바란다면, 우린 언젠가 아주 보잘 것 없는 나쁜 일에 부딪혀 또 하나의 삶의 고립을 양산하게 된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삶의 방향은 설정하되, 무언가에 부딪히면 잠시 서서 고민해 보면 된다. 그러면서도 제자리 걸음은 계속 한다. 오른 발, 왼 발, 오른 발, 왼 발. 누군가에게 오른 발이, 누군가에게 왼 발이 되는 것이 인생이다.
치우치지 않게 ‘정면을 응시하고 삶이란 자체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처음에 얘기한 ‘균형감각’의 다른 표현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 피하고 싶은 사람, 타고 싶지 않던 열차,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모임, 생각지도 않았던 날씨, 막판에 일시정지해 버리고 영원히 흘러가지 않는 오래된 필름, 그 모든 것은 과연 나쁜 일이었을까? 물론 누가 봐도 나쁜 일이란 존재한다. 그것까지 긍정의 마인드로 인정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삶에 그러한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그러한 상태가 될 수 밖에 없는 날이 있다는 것을 그냥 끄덕이며 담담히 수긍해 보자는 말이다.
심리적 허들을 뛰어 넘게 되면, 좋은 일과 나쁜 일에 구분을 두지 않게 되면, 당장은 모를 지라도 조금 시간이 흘렀을 때 내가 더 건강하고 밝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되기도 하고, 몇 년이, 혹은 몇 십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까.
심리적 경계가 없어지는 순간, 모든 일에 담담해 진다. 무감각해 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상황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에 가까워 지고, 어떠한 일이 내 앞에 일어나도 나는 그냥 나답게 하루를 보낼 수가 있다. 모든 일에 힌트를 발견할 수 있고, 시간이 흘러 인생을 더 충분히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감사한 순간이 늘어난다. 행복은 심리적으로 그럴 듯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터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오히려 자연스레 찾아오는 법이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왠지 직급도 높아져 있고, 좀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존경할 것 같고, 경제적인 여유도 한층 생기고, 내가 살고 싶었던 넓직한 집에서 살고 있게 될 것만 같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인생을 사뿐히 산책하듯 걸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심리적 허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는 배고프고 배고픈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그리 큰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억지스런 행복론 따윈 이제 지긋지긋하다. (물론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란 책은 꽤 유효하다.) 아둥바둥하던 삶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모든 상황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두려운 게 없으면, 하루에 수백가지 일상을 처리해도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벽을 쌓게 되면, 사람 한 명 만나는 것도 고역이다. 화가 증폭된다. 그리고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 안에 앉아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저급한 아이러니다. 그것이 행복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일상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가서 살면 될 일이다.
긴 호흡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심리적으로 모든 일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면,,, 어렵지만 한 발을 일단 내딛어 본다면,,,
우린 어제보다 좀 더 행복해 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