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단순히 인간의 불완전성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에 합격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또 다른 꿈을 찾아 달려가지만, 돈을 모아보지만, 원했던 사람과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 ‘석연치 않다’라는 표현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이전에 꿈꿔왔던 기대감, 충족감, 만족감, 희열, 열정, 카타르시스는 매번 성취한 이후 오래 가지 못한다. 무엇을 해도 그렇다. 누구를 만나도 변함이 없다. 무언가 가슴을 꿰뚫는 듯한 감정의 깊이와 용솟음치는 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는가? ‘새롭다’는 것은 무언가 더 나은 인생의 징검다리를 향해 점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이전과는 다른 그 무언가’를 찾아야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지향점이 또렷해 지며, 이 석연치 않은 느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것만 같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늘 새로움을 쫓고, 다시 그 새로움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그러한 반복된 일상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만들고 자꾸 멈춰 서게 한다. 멈춰서 곰곰이 생각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 데도 말이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할 때, 대부분의 책은 ‘행복해 지려고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는 듯 우리의 생각을 마음대로 정제하여 구분하고선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한 행복에 관한 담론은 잠시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지만, 본질적인 논의에는 진입하지 못한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 행복해진다는 두리뭉실한 감정의 연장선은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행복해 지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내가 나답지 않고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행복의 대전제는 우선 자신이 스스로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느냐이다. 직장에서 누군가에 이끌려 일을 하거나, 보고를 위한 보고의 하루를 보내면 왜 무언가 허무해지는가? 내가 나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하자고 한다. 나는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방법을 수정할 수 밖에 없고, 그 방향전환의 순간에 몸에서는 부대낌을 느낀다. 꼭 누군가에 의해 강요당하는 일상이 아니여도 나 스스로 내 안의 두려움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면 기분이 꽤 찝찝하다. 외적, 내적요인이 만들어 내는 이 모든 감정은 서두에 언급한 ‘석연치 않음’과 일맥상통한다.
한 번 더 쉽게 요약하고자 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쫓아 살지만,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그것은 결국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다.
월요일을 시작하는 두 사람의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자. A는 평소보다 30분 늦게 일어나 회사로 곧장 향하지 않고 근처 커피숍에 들러 업무시작시간이 다 되어서야 느즈막히 출근을 한다. 오전은 당연히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며 꼭 필요한 업무만 한 후에 점심시간만을 기다린다.
B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하여 바로 회사로 향하며, 미리 지난 주의 업무 중 우선순위를 정하여 충분히 고민한 후, 자료 리뷰와 메일송부용 자료를 스캔하며 심호흡을 한다. 9시 정각이 되자마자 가장 고민했던 일부터 처리하고, 가장 까다로운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표정에는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기운이 드러나고, 심지어는 왠지 모를 여유까지 묻어난다.
A, B 두 사람은 월요일에만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다른 평일과 주말 역시 상반된 맥락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A는 끌려다니고 숨고 피해가며 겉으로만 이상이 없는 업무를 한다. B는 어떤 길이든 같은 호흡으로 걸어가고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분을 굳이 하지 않는다.
A의 인생은 멀리 뛰기 선수가 도약하는 시점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말하자면 도움 닫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30분을 평소보다 일찍, 혹은 늦게 일어나는 차이는 꽤 미묘하게, 그러나 확실히 삶의 모든 자리에 영향을 미친다.
A의 일상을 조금 더 들여다 보자. 늘 주변의 요구에 허둥지둥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일의 마감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벼락치기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멍하니 있기 쉽상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불안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TV를 돌려가며, 따분한 일상을 더욱 따분하게 만든다.
‘삶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은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B를 지향하지만 A와 같은 일상이 부분적으로 삶에 얼룩진 듯 번져있다. 삶의 본질에 접근하면, 자기다움이 확보되고, 그것은 정체성의 강화로 이어진다. 새로운 것을 찾기 보다는 나다운 것을 찾고, 모든 삶의 순간에 피하거나 움추려 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의 결과와 관계없이 담백하게 행복할 수 있다. 삶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삶의 길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듯한 맥락이면서도 쉽지 않은 이 본질을 꽉 쥐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모든 일에 정면을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일하면서도, 친구를 만나면서도, 나 혼자 음악을 들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그저 정면을 바라볼 뿐이다.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그냥 바라보며 몰입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보다는 훈련을 통해 강화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성격으로 어느 정도 귀결지어진 학창시절과 같이 살기 위해선 너무 많은 이해관계와 목적이 난립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고 강화하고 유연해 지려는 훈련이 없이는 단 하루도 나답게 살기 어렵다. 흔히 하는 말로,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한다는 말은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빠져든다라는 정면응시의 법칙’과 매우 관련이 깊다.
둘째, 심리적으로 자신을 숨기는 동굴을 만드는 나약함을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만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 있다고 치자. 저 멀리서는 빠른 속도로 삶의 다음 STAGE가 성큼성큼 시간적 제약으로 압박하며 찾아온다. 이것을 만나기 싫은 특정 사람 혹은 월요일 아침의 짜증나는 업무와 관련지어도 좋다. 걸어가는 와중에 한 쪽 구석에 벽이 뚫려 있고 몸이 숨을 만한 장소가 보인다고 치자.
A라면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월요일 아침이 찾아오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웅크린 곳을 빠져나와 다시 정면의 직선코스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멀리 뛰기 선수인데 도움닫기가 없다. 상황이 닥쳐야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 발버둥치기 때문에 늘 조급하다. 만나는 사람들도 불편해 한다. 이 심리적 은신처를 만들기 시작하면 모든 일상에 살짝 비스듬히 임하게 된다. 불편한 상황을 굳이 만들지 않고, 불편해 지면 커뮤니케이션의 단절로 다시 숨어 버린다. 이 나약함을 버리지 않는 이상 늘 조급하고 불안할 뿐이다.
셋째, 주어진 상황에서 ‘결과’나 ‘방법론’에 절대 위축되지 않는다. 일의 결과가 뻔하게 좋지 않게 예상되거나, 방법론적으로 꽤 난코스인 경우 우리는 무언갈 시작조차 하기 전에 긴장하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게 된다. 일이 걱정되다가 될 대로 되란 심산으로 달라 붙어 무언가에 몰입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 압박, 직장 상사의 권위, 거래처의 막다른 골목식 독촉, 프로젝트의 중요성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해서 발생하지만 결과적으로 문제는 의외의 시점에서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이 된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그러한 외부적 요인에 의한 정면응시를 ‘타성적 몰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결과나 방법론에 위축되지 않고 바로 무언가를 해결하고자 차분히 진행하면 ‘자발적 몰입’으로 훨씬 단시간 내에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넷째, 화, 두려움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화의 감정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의한 변형적인 표현’이다. 원치 않던 사실을 남이 알게 되거나,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화를 내며 상황을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형적 감정은 아까 설명했던 심리적 도피처와 타성적 몰입을 강화하기 때문에, 곧장 걸어갈 일을 애써 우회하는 우둔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비춘 자기 방어’이다. 과거에 실패했더나,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를 받았거나,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한 좌절감이 두려움이라는 뒤틀린 감정으로 표현된다. 화나 두려움의 감정표현은 내가 나다워지는 길도 아니며, 결국 솔직하다는 허울 앞에 무너지는 ‘제자리 걸음의 자신’만 덩그러니 남을 뿐이다.
우리는 외적 시선에 길들여진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몇 십년 째 살고 있다. 그러한 외적 시선은 결국 외적 OUTPUT에 충실해져야지만 인정받는 삶을 표본처럼 양산했으며, 그러한 건강치 못한 삶의 지표는 ‘남의 눈에 맞추어 이렇게 살면 아마도 행복해 지겠지’라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타성적 인간’을 양산해 왔다.
이 ‘아마도’라는 표현의 함축은 삶의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한국형 사회인을 양산했다. 그리고 그것에 심히 중독된 누군가는 애기했다. ‘여긴 어차피 한국이잖아’라고. 그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너 또한, 나 역시 그러한 삶을 어떤 의미에선 잘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앞으론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타성적 인간’으로 살아 왔다고 치고, 앞으로 남은 인생만큼은 조금 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삶의 본질에 조금 더 접근하는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꼭 인간적으로 좀 더 그럴 듯 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조금 더 나다울 수 있는 순간을 외면하다가 나이가 들어 불현 듯 찾아오는 삶의 회한이 꽤나 허무할 것 같은 ‘긍정적 불안감’이 나에게 자꾸 속삭여서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고민을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일주일의 70% 이상을 직장에 다니며, 수면시간과 출근준비 시간을 제외하면 그 70% 일상의 대부분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내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그러한 사회생활에 쏟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타성적 인간’의 취약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회생활을 좀 더 산뜻하게 꾸려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삶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그러한 자그마한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정체성을 찾고, 나다워 지며, 더 행복해 질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