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빌런은 없다(10)
A 과장은 시쳇말로 ‘폭탄’이다. 사내 모두 직원들이 다 안다. 두 사람만 빼고. A 과장 본인 자신과 부서장인 B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A는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얘길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다. ‘감히’ A에게 그런 평판을 전해줄 간 큰 동료는 없다. 그런 소릴 했다가 언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B 부장은 무지하고 무심해서다. 부서장이지만 일만 잘하면 된다는 주의다. 그래서 부원들 평판 등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A의 진면목을 모른다. 저녁 술자리나, 흡연실에 한 번만 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그런 두 사람이 한 부서에 근무하게 된 게 석 달째다. 바야흐로 폭풍우가 서서히 멀리서 그 불길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모든 필연적 비극들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물 밑에서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예상했지만, 언제 일어날지 몰랐던 그런 일들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으니.
신사업 관련 회의가 있었던 월요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 회의에 대해서는 부서장 B뿐 아니라 모두가 마뜩잖아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매출을 돌려세울 아이디어를 가져오라는 사장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집된 회의. 코로나는 창궐하고 경기는 고꾸라지는 마당에 무슨 수로 상황을 반전시킨다는 말인가.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력부족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겨우겨우 끌고 가고 있는 형국. 그런데 여기다 신사업이라니. 충원도 해주지 않을 거면서 새 일을 벌이라니. 그냥 일하다 죽으라는 건가.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B 부장을 포함한 모두가 그런 불만으로 구시렁거리며 회의실에 들어섰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회의실에 미리 와 단정한 자세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는 A 과장. 혼자 신이 난 표정이다. 뭔가 의욕에 가득 차 있다. 동료들은 알고 있다. A가 저런 의욕적인 모습을 보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래서 생각한다. 오늘 무슨 사달이 나겠구나. 이런 날은 조용히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A가 회의 분위기와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동료들을 조지기 시작한다.
“C 씨, 그건 좀 심하지 않아요. 너무 구린 아이디어야, 언제 적 얘기야….”
“아유, D 과장님, 그런 걸 누가 상관해요. 너무 모르시네.”
A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동료들의 아이디어를 다 박살 낸 후 그제야 자기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친 기업 성향 언론사와 손잡고 대대적 캠페인을 벌여 부서 매출을 끌어올려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그러나 B 부장의 반응이 시원찮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좀 더 생각해 보자며 뜨뜬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에둘러 얘기했을 뿐 사실상 킬이나 다름없다. 동료들은 심상찮은 상황 전개에 일순 긴장한다. 예외 없이 A가 격분한다.
“부장님은 지금 신사업을 하자는 거예요. 뭐예요. 이럴 거면 뭐 하러 회의를 해요.”
“A 과장, 좀 신중히 생각해 보자고. 지금 우리 인원에 그 일이 되겠어. 인력동결이라는 건 다 알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찾아봐야지. 그 아이디어는 지금 우리 부서가 일을 다 중단하고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프로젝트야.”
“인력 얘기는 빼고 얘기하세요. 일손 타령하려면 뭐 하러 신사업 회의를 해요.”
이쯤 해서는 누가 부장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알 수 없다. B 부장과 A 과장의 설전으로 회의 분위기는 급격히 싸늘해진다. 다들 볼펜만 만지작거린다. 수석 차장이라도 나서서 A 과장을 탓할 만도 하다. 다른 부원들 의견을 묵사발내고, 부장까지 들이받았으니 ‘지금 뭐 하는 태도냐’고 한마디 할 만도 하다. 그러나 수석 차장뿐 아니라 모두가 눈을 깔고 입을 다물 뿐이다. ‘불알 안 깐’ 돼지 마냥 급한 성정의 A 과장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라서다. 그렇게 수습 불가능한 분위기 속에 회의는 결론 없이 유마무야 파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끝일까. 그 정도에서 물러설 것으로 예상했다면 A를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A는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만 내도 길길이 뛰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번엔 아예 개무시당한 꼴이다. 반격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 역시나 A는 회의 후 곧바로 SNS와 사내 여직원 커뮤니티에 B 부장을 씹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을 많이 시킨다느니, 사람을 편애한다느니, 무능하다는 둥 온갖 악담을 쏟아냈다. 익명인 데다 말투도 바꿨지만 사내 직원들은 누구나 다 안다. 누구 짓인지. 불쌍한 B 부장. 부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A의 타깃이 됐구나라며 다들 혀를 찬다. 그러나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는다. 나중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서다.
A의 반격은 계속된다. 점심시간엔 그녀를 따르는 몇몇 무리를 이끌고 또 한 차례 B 부장 험담에 열을 올린다. A와 어울리는 대부분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들이다. 동료 선후배들이 그녀를 피하니 어쩔 수 없이 ‘뭣도 모르는’ 신참들이 그녀의 간택을 받는다. 그런 전략이 어느 정도 먹힌다. 꽤 많은 신참들이 그녀의 ‘믿거나 말거나’ ‘아무 말 대잔치’에 공감한다. 윗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이다 발언을 쿨하다 생각한다. 거기다 외모도 나쁘지 않다.
사실 A는 외모로만 보면 호감형이다. 170cm 가까운 호리호리한 몸매에 옷도 센스 있게 잘 입는다. 일도 열심이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성과들을 내기도 했다. 갓 들어온 신참내기 중 멋진 선배라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남자 후배들도 적지 않다. 그러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물러나긴 하지만.
아이디어 회의 후 폭풍전야 같던 부서 분위기가 폭발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다. A가 아침 회의시간에 10분 늦은 날이었다. 아무런 얘기 없이 지각했다. B 부장이 회의 후 A를 불렀다.
“A 과장은 오늘 왜 늦었지?”
“네, 차가 막혀서 좀 늦었습니다.”
“늦은 건 문제없는데 그럴 땐 미리 얘기해 주는 게 어떨까. 다들 무슨 일 있는지 궁금해하잖아. 가뜩이나 차 사고도 많이 당하는 사람이니 그러지 않겠어.”(A는 운전 중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당한다. 일 년에 서너 번은 기본이다.)
“어제 밤샘 작업을 했어요. 제가 얼마나 일이 많은지 부장님은 알고나 계세요.”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회의 시간에 늦을 때는 미리 얘기를 해달라는 건데.”
“아, 씨팔, 정말 힘들어서 회사 생활 못하겠네.”
다시 맥락 없이 발끈한 A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는 또다시 시베리아처럼 급랭 전선으로 뒤덮였다. 모두가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전전긍긍이다. A가 그 후 며칠간 입을 꾹 다문채 어디를 부지런히 다니는 것 같아 더 그렇다. 동료들은 이제 매일 아침마다 ‘두두둥, 개봉박두’ ‘기대하시라. 한여름을 강타할 블록버스터’ ‘당신은 A가 올여름 할 일을 알고 있나’ 등 쓸데없는 잡담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다.
과연 A는 이런 사무실의 기대를 저버릴 인물이 아니었다. B 부장은 사흘 후 인사부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부하 직원으로부터 직장 내 갑질 민원이 제기됐다는 것이다. 같은 내용이 노조에도 진정돼 있다는 설명이었다. B 부장의 갑질로 더 이상 회사 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부하 직원의 민원이 제기된 이상 적절한 해명이 없다면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받았다.
B 부장은 어안이 벙벙하다. 부임한 지 석 달. A 과장과의 있었던 일이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한 것과 공식 회의석상에서 낸 아이디어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 것, 그리고 지각에 대해 지적한 것 3가지 밖에 없다. 직장 내 갑질이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애기인가. 과도한 업무를 지시한 것도, 폭언을 한 것도, 아니면 차별 대우를 한 것도 아닌데 갑질이라니. 어떻게 이런 불만이 나올 수 있을까. B 부장은 기가 막혀할 말을 잃는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A 과장을 상대로 직장 내 괴롭힘 소송을 걸고 싶은 심정이다. 거짓 정보와 악담으로 끊임없이 상급자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힌 데 대해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고 싶다. 왜 상급자는 항상 당해야만 하는가. B 부장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인사부에 그런 법 규정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행 근로기준법이 하급 직원을 보호하는 위주로 돼 있어서 상급자에 대한 역(亦) 갑질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B 부장은 그제야 인사 발령 후 동기인 전임 E부장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A 과장에 대해 “일 잘하고 예쁜 후배 아니냐”며 칭찬하자 E가 아무 말 없이 썩소만 날렸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별일 아니라며 그냥 지나쳤다. ‘일만 잘하면 되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그때라도 A의 신상과 평판을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B에 대해 미리 대비하고 맞부딪힐 일을 만들지 않았을 수 있다. 아예 부임 때 다른 부서로 빼달라고 얘기했을 수도 있다. 이제와 B 부장은 후회한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결국 A와 같은 문제 직원들의 평판을 챙기고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은 누가 뭐래도 상급자인 자신의 실책인 것을.
그제야 B 부장은 A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듣게 된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거나하게 술을 산 후 에야 뒤늦게 듣게 된 A에 대한 일화들을 말이다. A 과장이 어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는 얘기도, 과거 부서에서도 위아래가 없는 골칫거리로 방출됐다는 얘기도, 5년 전 있었던 동료 직원의 한마디를 걸어서 옷을 벗게 한 전력도 다 이제야 듣게 되는 얘기들이다. 한마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상 성격의 지랄탄이라는 결론이다. 사내 직원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B만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B는 그제야 깨닫는다. 회사 선배들이 인사철만 되면 왜 그렇게 능력 있고 일 잘하는 후배를 당기기 위해 전쟁 같은 로비를 벌였는지, 그리고 폭탄 평가를 받는 직원을 방출시키기 위해 왜 그렇게 사활을 걸고 뛰었는지를 말이다. 또 선배들이 술만 먹으면 왜 그렇게 폭탄 감별법과 처리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 침을 튀어가며 강변했는 지를 이제야 알게 된다. 그게 일로 성과를 내는 것 못지않게 직장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뒤늦은 후회와 자책일 뿐이다. 무지와 과오로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제는 치울 일만 남았다. B 부장은 인사부 문을 닫고 나오며 자신의 등 뒤에 칼을 꽂은 ‘액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사내엔 벌써부터 B 부장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나 순둥이 B 부장이 싸움닭 A 과장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쪽에 더 많은 이들이 베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B는 생각한다. 당신들이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게 있다고. 인생은 예외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마침 밖으로 나오는 A와 눈빛이 마주친다. B가 처음으로 그 눈빛을 끝까지 받아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