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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18. 2023

위원장님 납시오①

오피스빌런은 없다(9)

Y의 취미는 ‘뒷짐 지고’ 회사를 둘러보는 것이다. 189센티 키에 100킬로 가까운 거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회사 구석구석을 훑는다. 지하 5층부터 지상 4층까지 빠짐없이. 그럴 때면 만나는 직원들마다 “오, 위원장님, 별일 없으시죠.”라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싹수없다는 젊은 직원들도 그 앞에서는 어김없이 고개를 숙인다. 그를 모른 체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Y는 그게 기분이 좋다. 아마 사장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직원들로부터 진심 어린 인사를 받는 사람은 회사에 자신 뿐이라는 사실. 그게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더구나 위원장님이라는 직함. 과장도 부장도 상무도 여럿이지만 이 회사에 위원장은 자신뿐이다. 거기다 선출직이다. 이사회 임명을 받은 사장과는 격이 다르다. 나이는 20살도 더 먹었지만 계급장 떼면 이 회사에서 누가 이길 수 있겠나.

     

 Y는 ‘위원장님’이라며 인사하는 조합원들에게 더 친절하고, 살갑다. 꼭 이름을 붙여 인사해 주고, 그가 좋아하는 개그 코드로 답해준다. 그게 그의 특기다. 500명 가까운 직원들의 이름을 죄다 외우고, 그 사람의 특징을 하나씩 귀신같이 잡아내는 기술. 남들은 한번 하기도 힘들다는 노조위원장을 두 번씩 하는 비결이다. 이런 식이다. 오늘 아침 인사의 사례.


 “아, 위원장님, 식사하셨어요.”

 “그럼요, 은지 씨, 저번에 ‘우리 부장은 정말 하는 거마다 왜 밑에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Y는 여직원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 재연한다. 듣고 있던 여직원은 어머머 하면서 깔깔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다.)     

 “위원장님, 일전에 상의드린 저희 부서 건은 잘 될까요.”

 “아, 승찬 과장님. 제가 관리국에 다 얘기해 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삶은 암탉 같은 관리국장이 이러더군요. ‘아 그 문제는 이달 말 재무위원회에 정식안건으로 올려서 논의해봐야 할 것 같~네~요’ ㅎㅎ 아마 잘 될 겁니다. 기다려보죠.”(Y가 ‘삶은 암탉’ 같은 관리국장의 가는 하이톤 목소리와 말 끝을 이상하게 비비 꼬는 버릇을 흉내 내자 승찬 과장과 함께 왔던 부서원들 모두 배꼽을 잡고 자지러진다.)     


  Y는 그렇게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뭔가를 보고 따라 하는데 소질이 있었다. 또 그걸 보여주면 다들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따라 하기는 가족들의 말투부터 시작됐다. 우연찮게 할머니 욕을 따라 했는데 가족들이 배꼽을 잡았다. 그 뒤로 불평 많은 엄마, 술만 먹으면 혀꼬인 장광설을 늘어놓는 아빠 등으로 흉내내기 대상이 늘어났다. 그들은 따라 하기 또는 성대모사의 가장 좋은 모델이었고, 가족들은 그의 공연에 가장 열렬한 관객이었다. Y가 식사 자리에서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가족들은 “아이고, 웃겨. 정말 못살겠다. 막내는 꼭 개그맨 시켜야 돼”라고들 했다. 그런 반응이 그를 자극했다. 가족들을 완벽히 마스터하고 나자 이번엔 학교 선생님, 인기 있는 반 친구, TV에 나오는 인기 개그맨들을 연습했고, 결국은 전 현직 대통령까지 그의 연습대상이 됐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전두환)

 “이 사람 믿어주세요”(노태우)

 “학실히 책임지겠습니다”(김영삼)

 “에, 그걸로다가 말씀드릴 거 같으면”(김대중)

 “맞습니다, 맞고요”(노무현) 

 “내가 해봐서 아는데”(이명박)

 등 대통령 말투를 빼다 박은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박장대소가 터졌다. 집안 거실이나 교실, 학예회장, 맥줏집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는 인기스타였다.          

 

 Y는 개그가 천직인 줄 알았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춤과 개그에 미쳐있을 때도, 어리바리 들어간 대학에서 개그 클럽에 들어가 날을 샐 때도 식구들은 개그를 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들은 당장 하루하루가 힘든 가게 일에 지켜서, 각각 한 살 터울인 형과 누나는 자신들도 챙기기 벅찬 청춘사업에 바빠서 Y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잘한다 잘한다 영혼 없는 응원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개그맨 시험을 네 번 떨어지고, 백수 생활이 5년 차로 들어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가는 취직이고 결혼이고 다 종 치게 생겼다는 위기의식이 덮쳤다. 무작정 시험을 봤다. ‘무역의 무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다니는 무역회사에 원서를 냈다. 용케 2차까지 통과했다. 얼떨떨했다. 그런데 덜컥 최종 합격까지 한 것이다. Y 본인은 물론 집안 식구들, 친구들까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놀랐다.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면접 점수였다. Y는 ‘그렇고 그런’ 면접자들 사이에서 확실히 눈에 띄는 1인이었다. 긴장되고 떨리는 면접장에서 면접관들 특징을 잡아 흉내 내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도 안 하면 기적은 없다’는 심정으로, ‘될 대로 되라지’라는 생각으로 질렀다. 반응은 갈렸다. 서류와 필기시험 결과가 겨우 커트라인을 넘긴 데다 어딘지 경박해 보이는 품성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면접관이 반, ‘젊은 사람이 배포排布가 있다’ ‘눈썰미가 장난 아니다’라며 후한 점수를 준 면접관이 반이었다. 이탈자를 감안해 한 명 정도 여유로 더 뽑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렇게 Y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Y의 직장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모든 게 실적과 수치로 평가받는 회사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술 잘 먹고, 웃기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 오히려 독毒이 됐다. 입사한 지 한 해도 되지 않아 선배들 사이에서는 ‘일도 못하는 게 술만 잘 처먹어’ ‘저런 얘를 왜 뽑았지’라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며 분발하라는 몇몇 선배들의 충고를 듣고 이미지를 바꿔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평판을 돌려버리기란 재입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보였다.      

 

 Y는 입사 몇 년 만에 이리저리 치이고 구박받는 천덕꾸러기가 된 신세로 전락했다. 그만둘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다른 직장을 얻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어느새 직장은 지옥이 돼 갔고, Y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점차 자포자기 상태가 돼갔고, 그럴수록 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시간이 길어졌다. 회사는 그런 Y를 ‘반골 기질 무능력자’로 분류했다. 그런 Y가 어느 날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가자 회사는 술렁였다.      


 “쟤가 왜” “헐 이게 무슨 일이여” “웃기는 일이구만”등 시니컬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쫓기고 쫓기다 결국 노조행이라는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Y회사 노조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위원장직을 고사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선배는 “일도 못하는 게 노조에 가서 일 안 하고 삐대려 한다”며 면전에서 지청구를 해댔다.


 그러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Y는 계획이 있었다. 그는 애당초 근로자 권익이나 복지 향상, 정치 투쟁 등 노동운동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남의 얘기처럼 들었고, 그렇게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의 관심은 노조라는 권력이었다. 노조라는 조직을 차지하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또 그럴 만한, 노조위원장으로 출마하면 당선될 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Y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거대 노조에 소속돼 있지는 않지만, 나름 500명 이상 조합원을 가진 규모 있는 조직이었다. 사내 민심은 인정머리 없고 실적만 중시하는 대머리 사장에 대한 원성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 역대 위원장들이 친기업 성향이어서, Y와 같은 반골이 나서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결과는 78% 압도적 승리. 회사에 대한 민심도 영향을 줬지만 입심 좋은 후배들과 부어라 마셔라 술자리를 계속 가져온 게 큰 도움이 됐다. 그는 후배들 사이에서 할 말은 하는, 인심 좋고, 얘기가 통하는 선배로 통했다. 만취하면 가끔 하는 성대모사도 후배들과의 관계에 도움이 됐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밤을 새웠던 후배들이 선거 때 자진해서 죽자 살자 Y를 위해 뛰어줬던 것이다.  그리고 Y는 드디어 자신이 꿈꿔왔던 반란을 시작할 기회를 갖게 됐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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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IMG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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