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빌런은 없다(9)
Y는 노조위원장 당선후 1년간은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 행보. 조합원들과 만나 민심을 살피는데 집중하는 듯했다. 매일 조합원들과 만나 흉금 없이 얘기를 나눴고, 회사 쪽에 그런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사측에서도 새 노조위원장이 성실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그러나 2년 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합원들의 거친 목소리나, 때로는 무리해 보이는 요구도 받아들여 사측에 전달했다. 또 조합원들이 알지 못했던 수많은 경영·재무 관련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며 사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제야 사 측으로부터 ‘노조위원장이 너무 빡빡하다’ ‘노사 간에 대화하기가 힘들다’는 불만이 나왔다. 그런 얘기가 나올수록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Y에 대한 신임이 커졌다. 2년 후 그는 96%라는 역대 최고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Y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재선 직후부터다. 갑자기 노조 집행위원회에서 성비위 관련 설문 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5년 전쯤 미투 열풍으로 회사가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었다. 투서가 쏟아졌고, 몇몇 간부들이 조사를 받고 옷을 벗었다. 사측에서는 성비위 의혹 제기만으로도 즉시 인사 조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 이후로 성추행이나 성폭력 관련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위원장이 갑자기 성비위 건을 들고 나오자 다들 뜨악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문하는 김에 아예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설문도 같이 해보자”라고 제안했을 때 일부 노조 간부들은 그제야 위원장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Y와 친한 노조 간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평사원 때부터 얼마나 줄기차게 선배들의 만행에 대해 치를 떨어왔는 지를. 누구나 알듯이 당시 Y는 늘 욕을 먹는 천덕꾸리기였다. 선배들은 대놓고 면전에서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욕했다. 어떤 이는 “왜 아직도 거기 앉아있느냐” “너 같은 놈이 부서 정원만 잡아먹고 있으니 쓸 만한 얘들을 못 데려 오는 것 아니냐”라고 구박했다. Y는 그럴 때마다 피눈물을 흘렸다. 언젠가는 꼭 당신들 눈에서도 똑같이 피눈물이 나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Y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회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왜 갑자기 직장 내 괴롭힘이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서로 ‘그동안 그런 문제가 있었느냐’ ‘특별히 들은 게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도 잠시. 사내 게시판에 답이 쏟아졌다. 직장 내 괴롭힘과 성비위 관련 불만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익명 처리됐으나 그중에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례들까지 올라왔다. 이런 식이다.
서울 S대를 나온 전북 출신 모 부장은 입만 열면 ‘*새끼’ ‘씨*놈’ ‘뒤*라’는 둥 시궁창 냄새나는 욕을 입에 달고 산다든지, 현재 ‘노도강’(노원·도봉·강북구)에서 출퇴근하는 ‘빅 3 부서’(영업·총무·재무)의 모 차장은 회식 자리에서 ‘네가 여기 올 실력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거기 앉을 자격이 없다’라며 인격적 모욕을 가했다는 사연이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 자극적이고, 구체적인 사연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마른 풀숲에 불붙듯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회사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원이든 부장이든 간부 중 편하게 게시판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할 말이 많다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게시판에 올라온 가해 추정자들이 공교롭게도 Y와 관련돼 있는 인물들 일색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Y는 과거 자신과의 악연이 있는 선배들을 처단하기 위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짜놨던 것이다.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서기로 한 것도, 2년간 회사 민심을 다독인 것도 모두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재선으로 이제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만들어지자 검고 시커먼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Y는 먼저 자신과 죽이 맞는 두 명의 노조 간부를 술자리로 불렀다.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블랙리스트를 건넸다. 모두 13명. Y의 보복 타깃인 8명과 들러리로 따라붙은 5명. 들러리는 이번 사태가 Y의 개인적 악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희생양들이었다. Y가 돌격 명령을 내리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조가 먼저 포섭해 놓은 행동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루에 할당량만큼 게시물을 올리고, 서로 올린 글에 여러 개의 아이디를 이용해 댓글과 대댓글을 붙였다. 이른바 댓글부대다.
Y는 이런 식으로 게시판에서 여론을 만들어 설문 조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게 했다. 사내 게시판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된 가해 간부가 누구냐를 놓고 갖가지 추론과 억측이 난무했다. 게시판 댓글은 빨리 가해 간부를 조사해 잡아 족치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Y는 그제야 ‘심상찮은’ 사내 여론을 이유로 즉각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현장 실태 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뜨거운 지옥의 문이 열렸다. 일단 마녀사냥이 시작되자 회사는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부서장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언제 게시판에 자기 관련 글이 뜰지, 부원들 중 누가 자신을 단두대로 보낼지를 몰라 전전긍긍했다. 사원들은 사원들대로 설레발에 날을 새고 있었다. 게시판에 오른 부서장이 누구인지 스무고개를 하거나 자기들도 뭘 좀 보탤 게 없는지 과거 기억을 뒤지느라 바빴다. 한 직원은 10년 전 술자리 일로 ‘그때 그놈의 손모가지’라는 글을 올리자 가해 의심자는 당일 오후 휴가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 가해 의심자를 찾기 위해 회사로 경찰이 출동하고, 그날 오후 의심자의 집 주변에선 경찰들의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어졌다. (사흘 후 가해 의심자는 술에 취한 모습으로 회사 근처 골목에서 행인에 발견됐다)
사정이 이러니 일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결재가 하루 이틀 연기돼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사장조차 자신 관련 내용이 게시판에 오르는지, 누가 블라인드를 통해 이 같은 회사 상황을 외부로 알리는 것은 아닌지, 이사회에 이 같은 일로 책임을 추궁하려는 것은 아닌지 등에 신경 쓰느라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바야흐로 Y가 쏘아 올린 마녀사냥의 불꽃이 거대한 화염이 되어 회사 전체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