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빌런은 없다(8)
E부장은 사내에서 3 무(無) 부장으로 통한다. 물론 간부들은 모르는 얘기다. 그러나 밑에 직원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3 무가 뭐냐. 바로 회의와 회식, 야근이다. 다른 부서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거의 매일 하는 일이 E부장 부서에서는 터부시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의외로 간단했다. 따분하고 시간만 죽이는 회의 대신 필요한 내용은 부장이 직접 개별 카톡으로 내용을 전달받는다. 회식은 각자 알아서 먹는 것 대체하고 야근은 필요한 사람만 자율적으로 하게 맡긴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성과는 없지만 같이 일하는 부원들에게는 세상 편한 부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아~~~~, 자리에 있던 부장들은 일시에 감탄사를 발사한다. 감탄해서인지,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허를 찔렸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다만, 한꺼번에 동시에 그것도 똑같은 감탄사를 낸 것은 확실하다. A부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E부장에게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랄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E부장의 기막힌 처세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허실실, 존재감 제로인 E부장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심지어는 그가 존경스럽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현재는 일평생 계속돼 온 의사결정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기회비용)로 인한 리스크나 손해를 감내해야 한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성공하느냐, 아니면 그냥 편하게 살다 퇴직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마리의 토기를 한꺼번에 잡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쭙짢게 그런 시도를 했다가 ‘골로 가는’ 선배들을 본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결국 직장인 대부분은 승진을 택한다. 승진을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나 승진에는 희생이 따른다. 승진하려면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하고 되고, 그 성과를 위해서는 편안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일하든 부하를 닦달하든 어떻게든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편하게 살면서 승진하는 길은 없다. 유사 이래 변하지 않는 진리다. 단, 당신이 오너 자녀 거나 친인척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선배 세대들은 주로 부하들을 닦달했다. 과거엔 그게 통했다. 부하들을 잘 조져야 유능한 간부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밑을 조지면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사라졌다. 부하 직원들이 대놓고 말할 통로가 너무 많아졌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잘못했다가 영원히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직장인들이 많다.
결국 성공으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성과를 내기 위해 본인이 직접 뛰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밑에서도 싫은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싫은 소리를 하는 순간, 꼰대로 찍혀 평판이 추락한다. 평판 좋은 저低성과자는 살아남지만, 평판 나쁜 고高성과자는 살아남기 힘든 게 지금의 한국 직장이다. 따라서 열심히 뛰어서 성과를 내는 동시에 부하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판도 들어야 한다. 결국 성공의 길은 계속 좁아진다. 성과도 내면서 평판도 챙기고, 동시에 동료들과의 경쟁에서도 이겨야 하는 고난도 방정식이 됐다. A부장은 그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왔던 것이다.
E가 존경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기존 해법과 다른 해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제3의 길이라고나 할까. 성공이냐, 아니면 우아한 조기 퇴직이냐를 놓고 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에서 새로운 해법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E는 먼저 목표를 달리했다. 승진해서 사장까지 가는 길은 포기했다. 대신 가늘고 길게 하는 길을 선택했다. 만년 부장도 좋으니 할 수 있는 한 오래 부장자리를 지키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도 많은데 말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치고 올라오는 부하들 말고 그 밑에 부하들을 방패로 삼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서 쉽게 인사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부하들이 부장인사철마다 노조에 얘기해 E부장을 가만두라고 민원을 제기하게 끔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E부장의 이런 전략은 꽤 잘 먹혀든 것 같다. E는 현재 보직을 6년째 맡고 있다. 최장, 최고령 부장이다. 만년 부장 전략이 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A부장은 여태껏 그런 처세술을 본 적이 없다. A는 자신이 동기들보다 실적도 좋고, 승진도 빨라 혼자 잘 난 척해 온 게 부끄러워졌다. 사실 헛똑똑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좀 잘 나가면 뭐 하나. 부하 직원으로부터 ‘블라인드 협박’을 받고 새가슴이 돼 밥도 얹히는 주제에.
A는 새삼 궁금해진다. E부장의 그런 처세술이 어떻게 나왔을지. 세태변화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은 것 같은 저런 전략을 어떻게 세웠을지 궁금해졌다. SNS의 발달과 엠지 세대 진출로 그 어느 때보다 하향 평가만큼 상향 평가가 더 중요해진 시대. E는 항상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런 세상의 변화가 감지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직도 핵심을 놓치고 헤매는 동료 부장들은 어느새 불콰해진 얼굴로 한 마디씩 성토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다니는 거야”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부하들 눈치나 보고 살아서 되겠느냐고”
“부하들 눈치 보며 상향평가 잘 받아서 천년만년 부장하겠다는 거야 머야”
기분이 상한 데다 취기까지 올라오자 목소리는 어느새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커지고 있었다. 호프집 앞으로 내놓은 플라스틱테이블 옆을 지나던 젊은 보행객들이 그런 소란에 얼굴을 찡그렸다. 안타깝고 찹찹하다. ‘소리친다고 흘러가 세월이, 바뀐 세태가 돌려지니.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빨리 정신들 차리라. 모지리들아’
A부장은 어느새 술이 확 깨는 걸 느낀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다량 분출된 도파민의 효과일까. 정신이 말짱해지면서 빨리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픈 욕망에 사로 잡힌다. 달라진 세상, 달라져야 할 직장생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태도.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당장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직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술자리부터 빨리 파하는 게 좋겠다. 과거의 상념과 관습, 성공 신화에 사로잡혀 미몽에서 헤매는 이 무지몽매한 인간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꾸리꾸리하던 저녁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붕 없는 노천 테이블. 막잔을 들이켜던 취객들은 ‘에이 시팔’ ‘아 정말 지랄 맞네’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A는 그냥 오늘 밤은 시원하게 비를 맞고 싶다. 과거와의 이별을 축하하는 의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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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패스트파이브 삼성3호점 전경. https://fastfive.co.kr/branch_map_samseong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