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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16. 2023

3無부장의 전설①

오피스빌런은 없다(8)


“난 뭐 블라인드 이런 거 쓰지는 않지만….”


 A부장은 등짝에 식은땀이 쫘악 흐르는 걸 느꼈다. 직원들과 식사자리에서 나온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최근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가 오가던 차였다. ‘지난 3년간 회사는 끔찍한 지옥이었다. 그건 너 때문이었다. 너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혼자서 당하고 속절없이 고통받는 못난 내가 더 미웠다. 그러나 이제는 복수하겠다. 기다려라. 너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겠다. 절대 퇴사하지 마라’는 메시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복수의 메시지였다. 글이 뜨자마자 어느 부서 사람인지, 대상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단번에 회사가 들끓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글 작성자를 놓고 스무고개를 하던 때였다.     

   

  한 여직원이 그 와중에 이런 멘트를 날린 것이다. 본인은 블라인드 쓰지 않지만 요즘 엠지세대들은 불만과 불평을 털어놓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A부장은 심장이 덜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개구쟁이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A부장에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내가 블라인드에 글을 쓰거나 하지는 않지만 모르는 일이다. 조심해라. 언젠가 네가 칼도마에 오르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느냐’ 일종의 협박 공갈인가. A부장은 식사 내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연기하느라, 또 그런 대담한 협박을 한 여직원의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먹은 게 얹힌 것일까. 오후 내내 속이 좋지 않았다. 퇴근길. 오랜만에 동료 부장들에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마침 세 명이 화답했다. 회사 앞 치킨호프집. A부장은 은근슬쩍 다른 부서 분위기를 떠본다. 그러나 동료 부장들이 사정을 털어놓을지 모른다. 그래서 짐짓 먼저 자락을 깔아본다.      


 “씨부럴. 초년병 때는 개 같은 부장 때문에 고생하더니 이제는 엿 같은 부하직원들 때문에 숨도 못 쉬겠네. 이게 무슨 지랄 같은 세상이야. 어디 얘들한테 한마디를 할 수 있나. 좀 지적하면 쪼르르 노조로 달려가서 직장 내 괴롭힘이다, 성희롱이다 고자질하질 않나. 아니면 블라인드에 주절주절 올려놓지를 않나.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냔 말이야.”      


 A부장은 좌중의 분위기를 살핀다. 웬걸. A부장의 미끼를 던지자마자 동석자들은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게 아닌가. 마치 그런 소릴 안 했으면 큰일이라도 났을 것처럼, 마치 오늘 자기들도 그런 얘길 하고 싶어 죽고 싶었다는 듯 말이다.  


 “그러게 말이야. 이게 무슨 *같은 세상이야. 위에서는 실적으로 조지고, 밑에서는 애들이 괴롭히고. 아 정말 못살겠다 정말.”

 “후배들 무서워서 어디 살겠냐. 아주 부리는 게 아니라 떠받들어야 할 상전들이야. 상전!!”

 “아 옛날이 좋았어. 선배들에게 깨지긴 했지만 위아래가 있었잖아. 지금은 완전히 개판이야. 우리가 지금 상사 맞아. 부하들을 모시고 사는 거잖아. 막내가 제일 편해. 일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고, 야근이 뭐냐고 하고, 칼퇴하고. 아, 나도 그냥 막내 할래.”      


 불만과 불평, 하소연, 웃음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A부장은 새삼 이 정도였나 하고 놀랐다. 그때 A부장 옆에서 조용히 노가리를 씹던 동갑내기 B부장이 한마디 추가한다.        


 “야, 지난달 잘린 C차장 있잖아. 5년 전 신입한테 술자리가 와이당(*성적인 농담이 섞인 얘기) 한마디 했던 게 불거져서 그렇게 된 거잖아. 니들 알지?. 그 00부에 있는 그 빵빵녀. 그때 녹음한 걸 여태까지 갖고 있었대. 무서운 *이지. 여자가 앙심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딱 그 꼴이야. 그 *이 녹음테이프 여태 품고 있다가 C차장 승진하려는 순간에 빵 터뜨린 거잖아. 무섭다 무서워. 후배들에게 찍히면 이제 끝이야. 옛날에는 상사 눈치 보고, 지금은 후배 눈치 보고. 집에서는? 마누라 애들 눈치 봐야지. 아이 *팔, 어디 눈치 안 보는 태평양 섬으로나 가서 조용히 살 수는 없나. 그것도 안되면 어디 자연인처럼 짱 박혀 살든지 해야지 ㅋㅋㅋ.”     


 때마침 D부장이 얘기 흐름을 바꿔 놓는다. 최근 인사팀에서 들었다는 동료 부장에 대한 얘기를 고급 정보인양 테이블 위에 깔아 놓는다. D부장 얘기의 주인공은 후배가 아니라 동료인 E부장이다. 그들과 입사 동기인 E부장은, 다 알다시피, 평소 존재감 없이 조용히 일하는 스타일이라 한 번도 주목받은 일이 없었다. 특별한 성과도 없고, 승진도 항상 꼴찌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직 부서를 맡고 있다. 그런데 아직 부장자리를 꿰차고 있다. 동기들 몇 명은 이미 무슨 무슨 위원 등으로 보직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몇 년째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존재감도, 성과도 시원찮은 E가 자리를 지키는 이유. 다른 동료들도 전부터 미스터리로 생각했던 점이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는 게 D부장의 설명이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상향평가라는 것이다. E부장은 인사평가 때마다 부하직원들로부터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주인공이었다는 것. 그 때문에 회사에서도 그를 손대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처음 듣는 소리다. “오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만. E가 그럴 줄이야. 신기하네.” “어떻게 얘들한테 그런 점수를 받았대?” 모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씩 한다. D부장은 열띤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자못 거드름을 피우며 얘기를 이어간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부터 잘 들어봐. 이 하수들아’하는 톤으로 바뀌어 있다.  


    

2편에서 계속



#블라인드 #꼰대 #상향평가 #승진 #보직 #호프집 #미스터리 #존재감 #괴롭힘 #성희롱 #굼벵이


이미지=패스트파이브 삼성3호점 전경. https://fastfive.co.kr/branch_map_samseon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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