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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21. 2023

위원장님 납시오④끝

오피스빌런은 없다(9)

 가만 생각하면 세상 좋은 직업이 노조위원장이다. 위원장이 되는 순간, 사장과 동급이고 잘만하면 사장보다 더 센 권력도 가능하다. 모두가 위원장님이라고 떠받들고, 돈 쓰는 것은 또 어떠한가. 직원들 통장에서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이 노조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그 돈으로 가끔씩 명절 때 선물이나 돌리면 또 그렇게 감사하다고 난리다. 내 돈도 아닌데 말이다. 경조사비, 행사비로 펑펑 써도, 가끔가다 몰래 빼돌려도 누구 하나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누가 감히 노조 회계장부를 거들떠본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꿀보직이 어디 있을까. 이런 자리를 놔두고 구박받으며 천덕꾸리기로 한 시간이 아깝고 절통할 뿐이다. 이런 자리라면 2년, 4년 아니라 평생을 해도 좋다. 그래. 장기 집권? 안될 게 뭐 있어.       


 사실 Y는 그런 길로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회사 내 최고 권력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사내에서 사장 말고는 Y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임원이나 간부들은 ‘감히’ 찾아뵙겠다는 말을 못 한다. 잘못했다가는 단칼에 목이 날아가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나. 실제로 Y는 “사장도 내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고 있지 않나. 그런 발언이 사장실로 전달되지만 사장조차 분을 삭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나.      


  Y의 고개는 더 뻣뻣해지고, 배는 더 튀어 오르고, 헛기침이 부쩍 많아졌다. 어느새 ‘거들먹 배뿔뚝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그의 위상과 별명뿐 아니다. 그는 이제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조합원들이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와서 부탁만 하는 게 아니 꼽다. 이런 식이다.       


 아 정말 짜증 나네.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 그냥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내가 얼마나 바쁜데. 성의들이 없어. 성의들이.     


 그런 속내가 은연중 드러났을까. 뭔가를 들고 오는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카스나 홍삼 진액 박스 등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시간이 가고 선물이 흔해지면서 더 작고 값나가는 선물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부분 사무실이 아니라 개인적인 식사 자리에서 전해졌다. 예산과 인사, 물품 조달과 입찰 등 갖가지 청탁이 테이블 밑 봉투를 통해 위원장에게 들어갔다.      


 처음엔 문제가 없었다. Y는 처음엔 선물을 나눠주기도 하고, 일부는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선물의 단가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조 간부들 몰래 저녁 약속을 따로 잡기 시작했고, 그럴 땐 어김없이 돈 봉투가 오갔다. 특히 회사 간부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단위가 급격하게 뛰었다. 사장에게 못하는 얘기를 Y와의 저녁자리에서 은밀하게 털어놨다. Y는 정확히 봉투의 두께에 따라 성의의 크기를 측정했다. Y는 받은 봉투를 은행통장에 직접 넣는 것을 가장 즐거운 일과 중 하나로 삼게 됐다. 어느새 ‘봉투 위원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인불백일호人不百日好이라고 했던가. 100일 가는 꽃 없고, 100일 연속 좋은 일만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해가 중천이면 곧 서쪽으로 기우는 게 세상 이치인 것이다. 하늘을 찌르던 Y의 권세도 예기치 못한 일로 하루 새 땅 벌레만도 못한 신세가 됐으니.      


 그날은 Y가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지난 저녁 수확 실적이 좋았다. 점심과 저녁 모두 개인 약속을 잡았는데 단위가 모두 천 단위를 넘어갔다. 모두 빳빳한 5만 원 지폐.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가방을 든 손 맛이 그만이었다. Y는 돈을 박카스병 박스 4개에 꽉꽉 눌러 담아 쇼핑백에 넣었다. 서둘러 회사 인근 은행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500미터쯤 떨어진 00 은행으로 가는 도중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에 젖으면 쇼핑백 바닥이 터질 위험이 있다. Y는 안 되겠다 싶었다. 쇼핑백을 안고 뛰기 시작했다. 그때 큰길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Y위원장 너 새끼. 거기 안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큰길을 곧장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는 중년의 한 사나이. 굵은 빗속이지만 언뜻 봐도 그가 얼마 전 해고된, 자신이 직접 목을 쳤던, 자신의 집 앞에서 무릎 꿇고 흐느꼈던 K 선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Y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빗속을 뚫고, 지나는 차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Y를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말이다. 순간, Y는 오늘이 퇴직자들 퇴직금 정산일이라는 사실과 함께 여기서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은 정체불명의 돈다발을 들고 있지 않는가.      

 

 Y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인파를 뚫고 사력을 다해 뛰는 두 사나이. 고래고래 욕을 하며 고함치는 늙은 사내와 쇼핑백을 가슴에 안고 뛰는 거구의 40대. 누가 봐도 늙은이의 가방을 가로채 도망가는 소매치기로 보이는 형국이다. 그 영화 같은 장면은 의외로 싱겁게 끝을 맺고 말았으니.      


 고함소리와 행인들의 소란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은행 옆 경찰서에 지난달 갓 배치된 24살 먹은 젊은 여경이, 중앙경찰학교에서 실습 때 배운 그대로, 달려오던 Y의 정강이를 곤봉으로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그 순간 마침 은행 앞을 지나던 C일보 카메라 기자가 찍어 그 해의 보도 사진 상을 수상했다는 사진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찢어진 쇼핑백 사이로 흩어져 나온 황금색 돈다발, 그 돈다발을 줍기 위해 손을 뻗치며 소리치고 있는 Y, 그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는 K, 그런 그들에게 무언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젊은 여경, 돈을 줍기 위해 달려드는 수십 명의 행인들이 보여주는 아수라 같은 현장. 그야말로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완벽하게 담아낸 명작이었다.      


 당일 하루 종일 행방불명이었던 Y위원장의 모습을 다음날 C일보 조간신문 1면 사진을 통해 본 그 회사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호, 허무하고 허무한 권력이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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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IMG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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