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빌런은 없다(9)
Y는 당초 블랙리스트에 오른 13명을 모두 처단하고 싶었다. 자신의 타깃과 희생양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 먹었다. 심복 중 한 명이 무리하지 말라고 그를 말렸다. 칼이 무서운 것은 칼이 칼집에 꽂혀 있을 때라고 했다. 칼을 빼는 순간, 칼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피하거나 맞서야 하는 존재가 된다고 충고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보니 그 많은 사람을 쳐내게 될 경우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게 뻔했다. 만약 그들이 조직적으로 반항한다면?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이 역풍을 맞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Y는 전략을 과감히 바꿨다. 13명 중 시범 케이스로 3명만 날리기로 했다. 그 정도면 조직적으로 반항하거나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회사 측도 그 정도 선에서 일이 마무리된 데 대해 노조에 고마워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Y는 즉각 실행에 들어갔다. 심복을 통해 3명의 실명을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댓글과 대댓글을 통해 누가 봐도 칼날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 가능할 정도로 정보를 오픈하도록 했다. 그리고 해당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를 요구하는 공개 질의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Y가 조합 간부들과 저녁을 먹고 늦게 퇴근한 저녁, 한 선배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그는 입사 초 Y를 그야말로 쥐 잡듯이 닦달하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줬던 K 선배였다. 인사 한번 제대로 받아준 적 없고, 주먹으로 패지만 않았지 인간이 인간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그에게는 악마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Y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의 집 앞으로 찾아온 것이다.
“Y위원장,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잠깐 괜찮을까.”
“다 늦은 저녁에 웬일이신가요. 저는 지금 가족행사가 있어 들어가 봐야 합니다.”
“아니, 잠깐이면 되네. 우선 이것부터 좀 받게. 집에 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도 없고 해서.”
“아니요,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맡은 일도 있는데, 사사로이 이런 선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할 말은 내일 회사에서 만나하시죠.”
“아이고, Y위원장. 내 말 좀 들어봐 주게. 내가 잘못했네. 무릎이라고 꿇으라면 꿇겠네.”
“아니. 선배. 이제 무슨 짓입니까. 돌아가세요. 사람들 보는데서. 이거 참.”
Y는 그 순간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격렬한 희열을 맛봤다. 무릎 꿇고 흐느끼는 K 선배를 뒤로하고 들어오면서 뒷골을 타고 올라오는 싸하고 묵직한 승리의 전율을 경험했다. 아, 이거구나. 권력이란 게. 그렇게 혼자 잘난 척하고 기고만장하던 인간을 스스로 무릎 꿇도록 만드는 힘. 이래서 다들 승진하고, 출세하려 하는구나. 이게 바로 권력의 위대함이구나.
Y는 그날 이후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갖기로 결심했다. 3선 아니라 4선 5선까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노조위원장만 할 이유가 있느냐고. 노조위원장이 사장이 되는 공기업도 많다. 나라고 안 될 게 뭐 있느냐고. 그리고 요즘 돌아가는 회사 판을 보면 그런 생각이 영 느자구 없는 생각도 아니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그랬다. 노조 주도로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들이 해고되고, 회사 간부들이 노조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Y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직원들이 먼저 움직였다. ‘노조에 얘기하면 다 해결된다’는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민원거리를 싸들고 왔다. 한 둘 들어오더니 어느 순간 면담 시간을 따로 잡아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가 됐다. 인사문제부터 복지문제, 심지어는 연애와 부서원들 간 불화까지 민원의 종류는 한도 끝도 없었다. Y는 민원인이 늘어갈 때마다, 민원을 해결해 줘 고맙다며 굽신거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어. 내가 3선을 하는 수밖에. 누가 나를 대신할 수 있겠어. 이 사람들 얘기를 들어주고, 챙겨줄 사람이 회사에 누가 있느냔 말이야. 자기들 출세길이나 챙기기 위해 후배들 등골 빼먹을 줄이나 아는 저 인간들이 챙겨주겠어. 말로만 그럴듯하게 할 줄 알지 아주 날강도 같은 놈들이잖아. 역시 나 밖에 없어. 내가 좀 힘들어도 일해주는 수밖에.
Y는 이제 회사를 어슬렁거릴 틈이 없다. 사무실에서 잡힌 면담 일정만 소화하기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어렵게 면담 시간을 잡은 조합원들이 그 앞에서 아첨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Y가 ‘위원장님’이라는 호칭에 중독돼 있는 줄 아는지 말끝마다 ‘아이고 우리 위원장님 위원장님’하며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이러니 굳이 아침마다 나가서 성대모사하며 조합원들 앞에서 재롱을 떨 이유가 없다. 가지 않아도 찾아오고, 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와서 알랑방구는 뀌는데 힘들여 나다닐 이유가 뭔가.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