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찌질이 한국 남자들은 사과할 줄 모르나
저는 쫌생이입니다. 그것도 전형적인 ‘속 좁은’ 한국 남자입니다. 전에는 그런 줄 몰랐습니다. 적어도 잘 나갈 때는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게 결단력, 추진력, 의지 강한 남성들의 특징이라 생각했습니다. 속 좁은 게 아니라 옳은 걸 밀어 부칠 수 있는 '결단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일을 했습니다. 가끔 주위 동료들이, 가족들이 옆에서 뭐라 해도 흘려 들었습니다. 다 잘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잘 됐습니다. 우쭐했습니다. "내가 결국 맞았잖아"라며 으스댔습니다. 그러다 알게 됐습니다. 나이 50 넘어 경력과 평판에 흠집이 나고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야 뭐가 잘못된 걸 알아채게 거지요. 이제는 인정합니다. 제가 ‘속 좁은’ 전형적인 ‘찌질이’ ‘쫌생이’ 한국 남자라는 것을.
누군가 말했죠.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고.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시(詩)도 있고요. 문득 멈춰 서서 주위를 돌아보니 모든 게 뒤틀어져 있더군요. 가족 관계도, 친구 관계도, 회사 생활도. “그동안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서야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 사람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회사 선후배 동료들에게도. 나로 인해 힘들었을 주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사과’. 참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단어입니다. 그런데 문뜩 그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떠오른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내 뒤통수를 때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건 지인과의 술자리에서였습니다. 지인은 한국 사람들이 사과할 줄 모른다며 혀를 찼습니다. 그러면서 사과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걸 책으로 정리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이고, 내가 그걸 못하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지요.
부끄러웠습니다. 말 그대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기분.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고 살았던 시간들, 일에 취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나날들, 항상 좌충우돌하고 주위를 시끄럽고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스스로 나 밖에 몰랐던 생활을 ‘조직’이나 ‘성과’ ‘효율성’이라는 말로 포장해 합리화해왔던 과거 말입니다. 가끔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게 몸에 배었던 거죠.
가능하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시간들을 ‘하얗게 덫칠하고’ 거기를 배려와 협조, 상생 이런 단어들로 채워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쫌생이가 하루아침에 ‘대범남’ ‘상남자’ ‘배려남’으로 변신하지는 않겠지만요. 그러나 최소 그런 식으로라도 과거를 ‘분식’하고 새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일해 나갈 지에 대해서는 제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미 완구업체 마텔의 전 최고경영자 로버트 에커트)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먼저 누구한테 사과해야 할지부터. 대상은 한 둘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도 끝도 없습니다. 집사람부터 시작해서 직장 동료, 과거 학교 선생님까지. 심지어는 연락한다 해놓고 소식을 끊어버린 초등학교 친구까지. 그중 가장 힘든 게 집사람입니다. 사과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늙어 따뜻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재수 씨한테 잘해라”는 선배 말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대략 난감입니다. 직장 선후배 동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가 “그땐 미안했다” “그 일은 죄송했습니다” “그때 일을 사죄드립니다”라고 말하기도 뜬금없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사과하려니 자존심이 상하는 상대도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얘기했다가 상대가 코웃음 치거나 아예 대꾸도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됩니다.
사과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용기도 필요하고 뭔가 계기도 필요합니다. 거기다 상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의 분위기도 됐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만들어질까요. 그땐 이미 늦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냥 다짜고짜 말해볼까요. 내일 당장 집사람에게 “그동안 미안했어”라고? 그럼 집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기회가 되면 꼭 그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철든 50대 쫌생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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