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언어인 이유
20년 만에 '중국집 먹튀' 사과한 개그맨 정준하 씨
불과 얼마 전 일입니다. 지인들과 즐거운 저녁자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간단한 반주를 곁들인 자리여서 전철로 귀가하려고 막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저기요... 저기요”하는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저녁 식사를 한 가게 사장님이었습니다. 다들 무슨 일이지 하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이 숨을 헐떡이며 하는 말.
“계산을 아무도 안 하셨는데요.”
다들 황당한 표정. 서로를 돌아보다가 ‘풉’ 하고 터졌습니다. 서로 냈으려니 하고 그냥 나온 겁니다. 한 사람은 화장실을 들러 나오고, 한 사람은 전화한다고 방에 남았다 늦게 나오고, 한 사람은 먼저 나갔다가 이미 계산돼 있다는 소릴 듣고 그냥 나오고.
사장님이 잠깐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거지요. 방 치우러 갔다가 사태를 파악하고 뒤늦게 불이 나게 쫓아온 사장님. 아마 5초만 늦었어도 10만 원 가까운 그날 저녁값은 영영 못 받고 말았을 겁니다.
식당을 하시는 지인분들에게 물어보니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고의로 '먹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냥 나가는 분들도 있고, 계산 착오로 그냥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카운터엔 그 가게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을 앉히는 게 요식업의 불문율이라고 하는군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좋은 서비스를 하고,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도 돈을 못 받으면 다 말짱 ‘꽝’이니까요. ^^
음식점 먹튀 사건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게 10년 전 봤던 개그맨 정준하 씨 사례입니다. 당시 상당한 얘깃거리여서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143zSwMhQ
[먹튀 해서 죄송해요 ㅠㅠ중국집 사장님을 찾습니다ㅠㅠ "TV는 사랑을 싣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1991년 대입 삼수생이었던 정준하 씨는 수중에 돈이 없는 상태에서 학원 친구들에게 한턱내겠다고 중국집으로 갑니다. 돈은 없고 체면은 깎이기 싫고. 정 씨는 시켜놓은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머리를 굴립니다. 그리고 예상 가능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선택합니다. 10만 원 어치의 음식을 먹고 그냥 도망쳐 나온 겁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정 씨는 2011년 MBC 무한도전의 ‘TV는 사랑을 싣고’(1월 29일 방영) 코너에서 그때 일을 고백하고 당시 중국집 사장님을 만나 사과합니다. 정 씨는 방영 다음날 중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려 매출도 올려주고, 그때 못 갚은 돈도 몇 배로 갚았다고 하는군요.
제가 이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정준하 씨의 용기와 중국집 사장님의 멋진 멘트, 그리고 기막힌 타이밍.
우선 정준하 씨. 그는 당시 꽤 잘 나가는, 인기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창 시절 부끄러운 일을 서슴없이 털어놓더군요. 그게 뭐라고 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사는 연예인이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와 같은, 그것도 '좀도둑질' 행위에 대해 털어놓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에도 1. 왜 진작에 사과하지 않았느냐 2. 사과 안 하려다 프로그램을 띄우려고 뒤늦게 '쇼'하는 것 아니냐 3.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4. 사장님에게 충분히 배상한 것이냐 등등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런 속사정까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리고 지금 확인해볼 길도 요원하지만, 그리고 만일 그런 의혹이 모두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정 씨의 용기 있는 행동을 폄훼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 누구나 다들 마음속에 털어놓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을 적절한 계기와 보상이 주어진다고 훌훌 털어놓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개인적인 자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마 피하시는 분이 더 많을 겁니다.
정 씨는 그걸 거리낌 없이 하더군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는 자신이 두 번 ‘도둑질’(그의 표현 그대로 빌려 적음)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은 위에서 말한 중국집 먹튀 사건이고, 다른 한 건은 20대 학창시설 강원도 속초로 놀러 갔다가 해장국집에서 돈 안 내고 도망 나오고, 건어물 집에서 오징어 40마리를 훔쳤던 일입니다. 생각보다 절도 건수가 많아 좀 놀라셨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저지른 범행의 정도가 젊을 때 ‘치기’ 정도로 치부할 만한 것들인 데다, 공개적으로 이를 털어놓고 사과한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그렇게 정씨가 밉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집 사장님의 말씀도 잊히지 않습니다. 사장님은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정 씨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성공해줘서 고마워요. 그때는 다 그런 거지요.”
용기 내서 20년 전 일을 사과하는 젊은이와 이를 “그때는 다 그런 거다”라고 보듬고 쓰다듬어주는 어른.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대로 움직이는 TV 오락 프로그램이라지만, 현장에서 그런 광경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호통맨 박명수씨도 옆에서 울고 있더군요. 중국집 사장님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준하 씨 얼굴도 기억해서 방송에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때 그 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준하 씨처럼 음식 먹고 도망가는 일을 많이 있었어요. 다 아들 같고 딸 같았기 때문에 다 이해했고 한 번도 잡으려고 한 적이 없어요. 그 후에 그랬던 학생들이 성공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안고 식당에 찾아온 적도 있어요. 그때마다 기뻤고 고마웠어요.”
이 사과 타이밍도 정말 기막합니다. 중국집 사장님은 건강상 문제로 방송 직후 가게를 그만뒀다고 합니다. 정 씨가 방송 스태프들과 가게를 찾아간 것도 폐업 직전이지요. 정 씨가 조금만 늦게 찾아갔더라도 사장님에게 사과할 기회를 영영 잃었을지 모릅니다. 사장님도 그를 용서할 기회가 없었을 거고요.
브런치 펠로우들 가슴속에도 이처럼 크고 작은,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남아 가끔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상처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오늘이라도 사과를, 상처 치유를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모두의 결정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준하 씨의 용기와 사장님의 아량을 기억하면서....
P.S. 정준하 씨가 속초 해장국집과 건어물집에도 사과했는지는 알아봐서 들리는 게 있으면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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