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인 이유
밥 사러 식당 갔는데 지갑을 놓고 온 사실을 계산대 앞에서 알았을 때, 차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 갔을 때, 전철 개찰구 앞에서 현금이나 카드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미국 가려 공항 도착했는데 비자 만료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을 때….
다들 한 번쯤은 이런 당황스러운 경험이 있겠지요, 저는 모두 겪어봤습니다. 처음에는 황당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자책과 반성으로 이어지고, 결국 ‘뭐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우산과 가방, 지갑 등 잃어버릴 만한 것은 다 잃어버리고, 중요한 일정과 약속도 깜빡깜빡하기 일쑤인 저로서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들입니다. 문제는 그 일 자체보다 그다음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A냐 B냐 아니면 그냥 인샬라(신의 뜻대로)냐.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려 합니다. 몇 년 전입니다. 전날 술 한잔하고 전철로 출근하려던 아침이었습니다. 전철 개찰구 앞에서 지갑도, 카드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집까지 돌아갈 시간은 안되고... 잠깐 고민했습니다. '저 개찰구 바를 뛰어넘어 말아'. ‘아서라’하고 호출 버튼을 눌렀습니다. 젊은 역장님이 나와서 사정을 듣더니, 본인 지갑에서 돈을 꺼내 두 장의 승차권을 뽑아주더군요. 아 이렇게 친절할 수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퇴근길에 동료한테 돈을 빌려 군고구마를 사서 승차권 값과 함께 역장님께 드렸습니다. 그때 역장님과 동료들이 한 목소리로 “뭐 이런 걸”하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울교통공사(서울메트로+서울 도시철도공사)엔 그런 일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는 모양입니다. 지인이 몇 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해서 찾아봤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1018/86815342/2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 노인분이 4년 전 서울교통공사에 100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어릴 때 화상으로 장애등급판정을 받고 그동안 무료로 전철을 타 왔는데,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는군요. 이분은 자신이 무임승차한 이유를 “장애진단을 받아보려고 의사를 만났더니 나를 동정해서 장애진단을 해주었다”라고 설명합니다. 스스로 장애 판정을 받을 정도로 심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오랜 생각 후에 사죄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드리게 되었다”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5만 원권 20장을 동봉해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양심입니다.
이분뿐 아닙니다. 기사에 따르면 2015년에도 정 모 할머니가 경로우대용 교통카드를 부정 사용한 사실을 고백하며 10만 원을 보냈다고 합니다. 쓸 나이가 아닌데 어떤 연유로 그걸 갖게 돼서 사용하신 모양입니다.
더 올라가면 2007년에도 비슷한 미담이 있었다는군요. 1985년 인천에서 서울 잠실까지 표 없이 지하철을 탔던 노인 분이 22년 만에 요금 5만 원을 부친 일입니다. 이분도 “당시엔 다들 어려운 사정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면서 “종교생활을 하며 그게 마음에 걸렸다. 무임승차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죄드린다”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무임승차 관련 미담들은 차종을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버스요금을 무려 62년 만에 갚은 사연도 있습니다. 2018년 고향이 전북 순창인 김 모 할아버지(당시 78세)는 서울 반포동 금호고속버스터미널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1956년 당시 16살이었던 김 모 할아버지는 전북 전주에서 순창으로 가는 금호고속(당시 광주여객) 직행버스에 돈 없이 탔는데 그때 못 낸 요금을 갚기 위해서 방문한 겁니다. 김 모 할아버지는 손편지와 함께 10만 원의 돈을 내놓으면서 "지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갚게 돼 홀가분하다" 말했다고 하네요.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으셨길래 60년 넘은 시간에 직접 찾아가 갚을 생각을 했을까요.
https://www.yna.co.kr/view/AKR20181210080000054?input=1195m
다 아시다시피 한국에서는 지하철이든, 버스든 다 적자 사업입니다. 이 중 서울교통공사는 1년에 1조 원 넘는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무임승차'가 큰 이유라고 합니다. 무임승차에는 65세 이상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에게 주는 혜택도 있지만, 돈을 안 내고 타는 '부정승차'도 있습니다. 이 부정승차 행위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하는군요. 최근 6년간 서울시 지하철에서 부정승차로 적발된 사건이 26만 건이 넘고, 징수된 금액도 110억 원에 달한다는 통계입니다.
살면서 다들 실수를 하고 삽니다. 어려운 상황에 한때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삶'을 사는 것과 잘못된 삶을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곤궁하고 비천한 삶을 산다고 다들 잘못을 저지르고 살지도 않고, 한때 잘못을 했더라도 이를 바로 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두 선택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삶을 비천한 삶과 곤궁한 처지의 결과라고 핑계 대는 것은 궤변이고 비겁합니다.
장애등급 받은 할아버지의 100만 원, 경로우대카드를 부정 사용한 할머니의 4만5000원, 인천서 서울까지 무임승차한 할아버지의 5만원, 전북 할아버지의 버스요금 10만원은 '작은 돈 입'니다. 교통공사와 버스조합의 엄청난 적자를 메꾸기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잘못을 바로 잡은 양심의 선택이고, 마른 사막에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입니다. 그런 양심의 행동들이 모여 삭막한 대지에 물길을 내고, 궁극에는 사막을 푸른 대지로 바꾸는 힘이 되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이 자신과 당장 상관없는 일인데도 그런 사과 편지에 감동하고 환호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런 행동들이 모이고 쌓여 우리 후세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금보다 아름답게 바꿔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보낸 돈은 그 어떤 부자가 으스대며 내놓은 연말 기부금이나 성금보다 의미 있고 값져 보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노인분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서울교통공사 #70대 #사과편지 #1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