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사들은 '절대' 사과하지 않을까요.

미국에서 시행 중인 사과법(Apology Law) 도입에 대해

by 이리천



2019년 8월 10일 SBS에서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 '의사 요한'(8회)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사 허준이 과거 자신의 시술 잘못으로 고통을 느끼는 환자에게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언론들은 그 장면이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평가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돌려 2017년 12월. 서울 이대목동병원에서는 의료사고와 관련한 큰 분란이 일어납니다. 4명의 신생아가 인큐베이터에서 한꺼번에 죽은 참사가 발생했는데, 병원 측이 유족들에게는 한마디 사과나 해명 없이 기자들에게만 고개를 숙인 겁니다. 뒤늦게 기자회견장을 찾은 유족들은 "이대목동병원의 우선순위는 기자들이냐. 유족이냐.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며 절규합니다.



의사들은 사과를 하지 않습니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사과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에 가깝습니다. 의대를 들어가면 선배들로부터 "절대 사과하지 말라"라고 배운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과하는 순간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문율은 어느 나라 의사들이나 다 마찬가지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https://brunch.co.kr/@cathykimmd/240


198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는 당시만 해도 다른 주에 없는 특이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의료인들이 의료 사고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더라도 의료 소송에서 사과 자체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제한한 법입니다. 일명 사과법(謝過法, Apology Law)이죠.


이 법을 시행한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진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를 들은 후에 소송을 진행할지 여부는 피해자의 자유입니다. 다만, 의료인이 사과한 것을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인 사과 표현뿐 아니라 피해의 결과로 초래된 병원 비용을 지불하거나, 그러한 지불을 약속하는 행위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법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의사들도 사과하지 않는 게 관행에 가까웠습니다. 사과가 소송을 불러오고, 그 경우 의료비용도 늘어나게 된다는 전제 때문이었지요. 때문에 의료인들은 사고 후 피해자나 그 가족들과의 소통을 최대한 피했습니다. 사과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피한 거지요. 소송이 들어오면 대응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또 소송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자기 방어적 의료 행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필요 이상의 검사를 하고, 진료행위를 질질 끄는 등의 행태를 보인 것이죠. 이 때문에 의료비용은 비용대로 늘어나고, 소송은 소송대로 많아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사과법 시행 후 분위기가 바뀝니다. 사과에 대한 기본 전제가 잘못된 게 확인된 겁니다. 미시간대학병원의 사례입니다. 이 대학병원은 2000년대 초부터 의료사고 발생 시 실수나 잘못에 대해 병원 측이 환자와 가족에게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사과하며, 적절한 보상책을 제시하는 정보 공개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전인 2001년과 적용 후인 2005년을 비교한 결과, 의료사고 관련 소송 건수는 262건에서 114건으로, 연간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30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로 각각 줄었습니다. 소송 해결에 들어가는 시간도 20.7개월에서 9.5개월로 절반 이상 감축됐습니다.


이는 매사추세츠나 켄터키 뉴욕주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과 행위에 면책권을 주자 소송 건수도 줄고, 의료 비용도 줄어드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 겁니다.



https://jmagazine.joins.com/forbes/view/278388



또 다른 연구 사례입니다. 매사추세츠 의대의 캐슬린 마졸 교수팀은 피해자들이 왜 소송에 나서는지 그 동기를 파악하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의사가 자신의 실수로 합병증을 겪은 환자에게 정확히 사정을 알리고 사과하는 경우와 상황을 알리긴 하되 사과 대신 금전적 보상을 제시하는 가상 상황을 설정해 분석한 거지요.


실험 참여자들은 의사 실수로 심각한 합병증이 생겼다는 통보를 받은 후 46%가 다른 의사를 찾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또 16%는 의사를 고소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로부터 솔직한 설명과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은 후엔 의사를 바꾸겠다는 응답은 19%, 고소하겠다는 응답은 4%로 각각 줄었습니다.

반면 사과 대신 금전적 보상을 제시한 경우는 의사교체나 소송에 대한 결정에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의료사고에서 사과와 반성이 소송 진행 여부에 미치는 영향이 명확하게 드러난 거지요.


많은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소송으로 가면서 "의사가 한마디라도 사과를 했더라면"이라고 말합니다. 의사들도 자신의 실수를 평생 가슴의 멍에로 안고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고 사과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환자 앞에 나서지도, 사과하지도 않습니다. 소송에 대한 두려움은 사고 가해자인 의사까지 피해자로 만드는 족쇄입니다.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주를 시작으로 현재 40개 주가 사과법을 도입해 시행 중에 있습니다. 영국 호주 등도 사과법을 시행 중입니다. 아시아에서는 홍콩이 2017년 12월 처음으로 사과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입니다. 2018년 사과법 도입이 잠깐 추진됐습니다. 보건복지부가 환자 안전사고 발생 시 의료진과 환자ㆍ보호자가 보다 원활하게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사과법'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자유한국당 김상훈 의원이 관련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법안은 본격 논의되지 못하고 20대 국회가 끝나면서 유야무야 됐습니다.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게 사과는 단순한 해명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와 한(恨), 그리고 진실에 대한 갈증을 풀어줘야 합니다. 소송은 그다음 일입니다. 의사들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사과법은 의료현장에서 환자나 의사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루빨리 도입해야 할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입니다. 국회서 누군가 사과법 제정 총대를 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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