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너무 더웠어. 세상이 온통 타버리는 듯했지. 며칠째 비 예고가 틀려 기상청 무용론이 일었고 사람들의 불쾌지수는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어. 시원한 에어컨도 소용없었어. 훅 들어오는 바깥바람은 목부터 숨을 막히게 할 지경이었지.
불이 어디서 시작된 지는 아무도 몰라. 평창동 산자락에 위치한 단독 고급주택을 휘감은 거대한 화마(火魔). 바깥 외출에 지쳐 샤워 후 잠시 눈을 부쳤다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쉬고 있던 지하층을 뺀 3층 건물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어. 언덕 구릉을 뚫어 낸 지하층 통 창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좌절에 발만 굴렀을 뿐 소리도 지를 수 없었어.
경찰에서는 층마다 추울 정도로 틀어놓은 에어컨 등 가전제품이 발화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했고, 또 TV에 나온 전문가는 사고 전 벨기에서 들여온 최고급 전신 안마기에 붙인 전압 변동기에서 불꽃이 시작됐다고도 했어. 하지만 끝까지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
산자락에 위치해 소방차 접근조차 어려워 헬기 두 대가 떠서 겨우 진압했던 그 불. 나와 연관됐던 모든 이들의 주검 앞에서, 불길을 잡자마자 막 내리기 시작한 장대비 앞에서 난 울 힘조차 없었지.
그날 이후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어. 어디서 시작된 지 모를 불이 집 채만큼 커지고, 뒤늦게 허둥지둥 도망치는 나를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이 부르고. 나는 밤새 도망치고 소리치지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해. 까만 얼굴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덮치기 직전. 난 숨을 헉 들이키며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곤 하지.
그 불 전까지만해도 내 삶은 완벽했어. 부모를 따라 해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어. 뼈대 있는 가문에 좋은 부모, 풍족한 환경, 심지어는 잘 빠진 몸매에 빨아들인 눈망울까지. 거리에 나가면 모든 여성의 시선을 훔치는, 남성들까지 자존심을 접어놓고 탄성하게 만드는 ‘준족’ 같은 외모. 그게 바로 나였어.
한국에 들어온 지는 5년 전쯤. 누구나 한번쯤 선망하는 평창동 단독 고급주택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내 인생이 3년 만에 이렇게 바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날 내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M도 벼랑 끝에 서 있었어. 기사를 쓰는 전문직 여성이란 허울좋은 레벨만 붙어있을 뿐, 회사에서는 사직 권고를 받는 천덕꾸러기였고 그 때문에 늘어난 혼술은 체중을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지. 친구도 애인도 없는 외로운 처지. 헬조선 어디서나 볼 수 있듯 과년한 딸에게 결혼을 압박하는 어머니나, 결혼 생활도 직장 생활도 ‘비교 불가’로 잘하는 슈퍼우먼 여동생도 기댈 곳이 아니었지. 철저히 외톨이로 나락한, 외톨이임을 잊어버린, 어느덧 외톨이를 즐길 수밖에 없게 된 M.
사실 몇 해 전 그녀는 사내에서 잠깐 스타였던 적이 있었어. 혼술에 갈고닦은 폭탄주 제조기술이 우연한 기회에 빛을 발한 거지. 회식 자리에서 화주, 충성주, 폭포주, 바나나주, 수류탄주, 타이타닉주 등 화려한 폭탄주 제조 기술로 50대 이상 간부들의 감성을 사로잡았지. 소문이 돌자 20~30대 후배들도 그녀를 초청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시 메로나주, 소메리카주 등을 말아 '하수들'(그녀의 표현)의 기대를 만족시켜줬지.
존재감 없던 그녀가 금세 사내 스타로 떠올랐고, 여기저기 초청받게 된 거야. 황홀했던 그 존재감.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식자리 때마다 이어지는 과음과 악명 높은 주사 때문에 그녀는 곧 기피 대상 1호 리스트에 올랐어.
다시 심연으로 나락한 M. 당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가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만큼 자살 사이트에서 정보를 조금씩 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몰래 수면제를 사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