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처음부터 비를 피할 생각이 없었어. 비가 언제부터 오기 시작한 건지, 얼마나 굵은 장대비인지, 그 비에 내가 얼마나 젖었는지 관심 없었어. 그냥 걷고 싶었지. 그저 그 비가 내 상실까지 모두 씻어 내려가 주기만을 바라면서 말이야.
그러다 그 편의점 앞에 우연히 섰던 거야. 바닥에 떨어진 핫바 때문에. 누군가 밟고 지나간 핫바의 짓이겨진 모습 때문에. 그 모습이 나처럼 보여서일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슬픈 눈으로 바닥에 짓이겨 들러붙었다가 비에 불어 오르는 핫바를 지켜보고 있었지. 누가 또 밟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야.
그때 M이 저녁거리를 사들고 편의점을 나오다 날 본 거야.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그녈 돌아봤지. 무릎이 나오기 시작한 면바지에 슬리퍼, 편의점에서 산 지 얼마 안 된 듯한 투명 비닐우산을 쓴 그녀. 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았던 그녀.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그 장면은 영화의 한 컷 그 자체였어. 멈춰버린 시간.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얼음땡. 그렇게 3초? 5초?
M이 나에게 다가왔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지.
“우산 씌워줄까?”
나는 외면했어. 가던 길을 그냥 갔지. 내게 말을 건 그녀 생각보다는 ‘누가 핫바를 또 밟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걱정을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쁜 놈이었군)
사흘 후 편의점 앞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그날처럼 우연이었어.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저녁을 사가는 그녀. 슬리퍼 차림 대신 여느 직장인의 비즈니스 룩이었지. 박시한 재킷과 폴로셔츠, 검정 슬랙스에 닥스 구두. 거기에 노트북 가방까지. 아마 그녀의 슬픈 큰 눈이 아니었다면 못 알아봤을 수도. 그러나 대번에 그녀를 알아봤지. 그녀는 알은척했지만 난 다시 외면했어. 큰 이별 뒤 만남이 두려워서였을까.
세 번째 만났을 때는 더 이상 외면하지 못했어. 그녀의 말을 받아줬지. 왜 였을까.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나보다 그녀가 더 불쌍해 보여서일까. 아니면 좀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우리 동거는 시작됐어. 그녀의 방. 회사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도심 번화가 이면도로 주택가 원룸 건물 4층. 붙박이 냉장고와 벽면 수납이 가능한 침대와 책상, 그리고 혼자 쓰기엔 과해 보이는 4인용 식탁과 그 한편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 언제 사용한 지 모르는 러닝머신과 그 옆 목재 선반에 열 지어 쌓아 놓은 와인병들,30대 후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 인형들이 자리를 못잡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 모두 그녀만큼 안돼 보였어.
M은 내 눈이 예쁘다고 했어. 나만 좋다면 계속 같이 살아도 좋겠다고 했어. 씻고 나서 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지. 죽음과도 같은 휴식 속에 나는 익숙한 악몽으로 빠져들었지.
(내 사랑엔 배신이 없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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