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소방관이었고, 나는 상담사였다

가족이라는 굴레

by 잎새

그는 소방관이었고, 나는 상담사였다

어떤 날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콜이 없었다.
간만의 한가함.
마음에도, 말끝에도 여유가 감돌았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상담사 000입니다.”

그러자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
“안녕하세요, 상담사님!”

그의 목소리도 환했다.
너무나 또렷하고, 너무나 생기 있게.

순간, 어딘가 낯설었다.
채무상담이란 대체로 눅눅하다.
무거운 숨소리, 예민한 반응, 그리고 삶에 찌든 고단함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다.

그는 소방공무원이었다.
누군가를 살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
그의 존재 자체가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말 속에 감춰진 숫자는 무거웠다.
월 상환금 300만 원.

그는 말했다.
“부모님 병원비도 제가 내고 있고요, 처가 쪽도 좀 도와야 해서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가족이잖아요.”

양부모님, 처가 식구들.
모두가 그에게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람을 구하던 그가,
정작 자기 삶은 구하지 못한 채,
그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진심인지, 습관인지조차 헷갈릴 만큼.
그 웃음이 너무 밝아서,
도리어 가슴 어딘가가 서늘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그는 오히려 내 안부를 물었다.
“상담사님도 고생 많으시죠? 힘내세요.”

한순간, 목이 메었다.
내가 상담을 하고 있는 건지,
위로를 받고 있는 건지.

나는 급히 음성을 다듬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서 우러난 웃음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꼭 잘 되실 거예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뭔가 따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따뜻함엔
먹먹함과 서글픔이 섞여 있었다.

가족.
참 복잡한 말이다.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묶인 사람들이
어느새 한 사람의 날개를 묶고
자신의 무게를 걸어두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그 굴레를 사랑이라 여겼을 것이다.
마치 고(故) 구하라의 어머니처럼,
등에 올라타는 가족도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피는 핏줄에게 당연히 쏟아야 할 의무라며.

그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가족이란,
사람을 구속할 수도,
혹은 진짜로 구원할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날의 그 밝은 목소리는,
아직도 가끔,
내 마음의 어두운 날에
문득 생각난다.

긍정이 어둠을 해결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날만큼은 나를 살짝 밀어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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