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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언 Sep 03. 2024

언젠가 그리워질 발자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사막_오르텅스 블루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일등으로 당선된 시라고 알려진 이 시를 나는 언제 처음 읽었던가. 아마 대학생 때였던 것 같다. 여전히 뚜렷한 목표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삶의 이유라든지, 사랑 같은 답도 없는 허상을 쫓고 있던 무기력한 젊은 날이었다. 이 쓸데없는 젊음을 어떻게든 다 써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리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리웠다. 내게 주어진 젊음과 넘치는 시간들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모든 시간들이 이제 와 그립다. 무언가를 위해 애쓰던 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던 무기력한 날도 그립다. 특별한 날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이 더 그립다. 처음 가본 도쿄에서 본 도쿄타워보다, 폭설로 멈춰버린 오다이바의 무인 전철이 기억에서 맴돈다. 맥주를 사러나가겠다며 폭설을 뚫고 간 편의점이라던가, 바에서 시켜 먹은 앤초비 피자가 매우 짰다는 것과 어떤 선물이 좋을까 고민하다 겨우 고른 손수건을 건넸을 때 엄마의 표정.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보며 새파란 하늘과 마주했을 때 문득 떠오른다.


 사소한 순간이 더 소중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매 순간을 만끽할 순 없지만, 그리워질 순간을 감지할 수는 있다. 어떤 순간이 오면 '아 나는 평생 이 순간을 그리워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때 유난히 더 그랬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창가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을 때면 늘 생각했다. 나긋한 선생님의 목소리와,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공 차는 소리, 아이들의 함성소리 같은 걸 나는 평생 그리워하겠구나 하고.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가 그리워지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어른이 되지 못한 내 마음이 늘 근처에서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십 년이 넘도록 그 동네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파란 하늘과 서늘한 바람은 문득 나를 어떤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럴 때면 그 시절에 찍은 사진을 꺼내보거나 썼던 글을 찾아 읽어본다. 그러다 연락이 끊긴 친구 몇 명의 소식이 궁금해져 SNS를 찾아봤다. 친구의 친구까지 계속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기도 했지만, 몇 명은 아예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 시가 떠올랐다. 제목과 작가가 한 번에 기억나진 않았지만, 너무도 외로워 종종 뒷걸음질로 자신 앞에 찍힌 자기의 발자국을 보며 걸었다는 문장만큼은 또렷이 기억해 냈다. 끝내 사람은 찾지 못했지만, 시는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할 때면 SNS를 찾아본다.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들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얄팍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 언젠가 갑자기 그 연결점마저 싫어질 때면, 모든 이들의 연락처를 삭제하고 내 번호도 바꾸어버린 채 몇 년 동안 잠수를 타버리기도 했다. 사실 여러 번 그랬다. 그때 잃어버린 연결점은 이제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인연의 소중함을 함부로 여긴 대가다.


 한때는 아무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누구든 필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발자국을 지우기 바빴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그때가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발자취를 돌아보려 해도, 발자국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버리기 천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집안에 잡동사니가 쌓이는 게 싫어서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건 바로 정리해버리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면 깨끗하고 텅 빈 공간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든다. 발자국 없는 서른네 번째 길 위에서, 이제라도 뒤돌아 걷다보면 언젠가 그리워질 발자취가 쌓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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