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고 싶은 글은

by 반짝반짝수정

출근하자마자 책 선물을 받았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실장님께서 친형님이 시인으로 등단한 뒤 처음 발간한 시집이라며 하늘빛 표지의 책 한 권을 건넸다. 인터넷 서점에 리뷰도 하나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본인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이야기를 써놓은 건지 모르겠다며 슬쩍 웃으셨다. 책 선물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라, 함박미소로 책을 받았다.


뒤표지를 가득 채운 다른 시인의 추천사를 훑으며 이 시집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지 미리 상상해보았다. [이경주 시인은 풍경화가다.] 추천사의 첫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글을 풍경처럼 그려내는 작가들의 표현력을 늘 동경해온 터라, 그 한 문장만으로 시집을 빨리 읽고 싶어졌다. 간단하게 적힌 작가 소개조차 괜히 좋았다. 목차를 넘기고 시작하며 남긴 짧은 작가의 말을 천천히 읇조리며 읽었다. 입안에서 단맛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세탁기는 생활용품 중에서도 단연 필수품이다. 세탁기는 더러운 옷가지를 깨끗하게 빨아주는 그저 편리한 생활가전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인의 눈은 전혀 달랐다. 아래의 내용은 발해철물점_이경주시인의 시중 하나다.

꼭 붙들고 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세탁기에서 빠져나온

팔과 다리들이

나뭇뿌리처럼 엉켜 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꽁꽁 묶이어 있는 저것들은

소용돌이가 커질수록

더욱 단단하게 서로를 엮는

어지간한 힘으로는 떼어내지 못할

한 가족이다

- 이경주 시인의 시집<발해철불점> 중 -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세게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탁이 끝나면 엉킨 옷들을 풀어 건조기에 넣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온 나에게, 시인은 그 장면을 가족이라는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소용돌이가 커질수록 더욱 단단해진다는 표현이 그동안 내가 지나쳐온 일상의 풍경을 전혀 다른 표현으로 바꿔놓았다.


이 시집의 전체 분위기가 그렇다. 길가에 떨어진 흔한 장갑, 식당 메뉴중의 하나인 족탕, 쓰레기봉지에서 음식물을 파헤치는 비둘기 떼, 누군가가 뱉어놓은 가래침 등 누구나 매일 마주하지만 아무도 깊이 바라보지 않는 장면들은 모두 시가 되었다. 이런 시선과 표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이는 것을 넘어 그 뒤에 숨어 있는 다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이경주시인은 평소 얼마나 많은 관찰과 사색이 쌓아왔을까. 하루 24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건만, 직장 다닌다는 이유로 주부라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생각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던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해왔던 나는 과연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빨리 읽히고 쉽게 지나가는 글보다 꼭꼭 씹어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올라왔다. 그렇다면 나 역시 깊은 관찰과 끊임없는 의문, 깊은 사색을 일상 속에서 즐겨야 할 것이다.


130쪽 남짓한 이경주시인의 이야기에는 아직 읽지 못한 풍경들이 빼곡하다. 단숨에 읽어버리기엔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든다. 천천히 꼭꼭 씹어 읽으며 여유롭게 상상해보려한다.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일상을 그냥 지나치기보다 한줄씩 시처럼 기록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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