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많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어린 시절인 경우가 많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에게 혹은 부 주변의 어른,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들 때문이다. 그때 연약했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엔 여전히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착한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히려 과도하게 자신의 부모를 이상화하거나 좋은 부모로 포장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이유로 상담실에서 객관성이 떨어지는 부모를 향한 애정과 찬사는 오히려 부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 그래.. 그땐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랬어. 나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 부모는 양호한 편이었어."
" 엄마/아빠도 그때 많이 힘드셨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이런 어설픈 이해와 성급한 용서는 개인의 마음을 회복하는 데도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물지 않은 상처와 꺼지지 않는 분노는 언제 가는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으면 곪아 터지는 것은 당연하고 꺼지지 않은 불씨는 작은 바람에도 다시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다. 치유의 핵심은 우선순위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치유의 시작은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먼저라는 것이다.
착한 어른이 된 무기력했던 아이들은 또다시 부모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른스럽고 성숙한 행동이라 믿는다. 거기다 효도가 문화의 큰 중심인 우리 사회에서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 자체가 큰 불효를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방치된 자신의 마음은 어느 한구석 늘 쓰리고 아프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올 때 혹은 배우자나 아이와의 관계에서 큰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곤 자신이 과거의 상처를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치유의 목적이 아니다, 그때 무기력하고 상처받았던 자신의 마음을 먼저 보살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상대를 성급히 이해하려고 하고 덮어버리려 하기보다, 생기지 말아야 불행과 학대를 경험했거나 있어야 했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부재했던 어린 시절을 애도하는 과정이 먼저이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거나 죽거나 아플 때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와 상처, 관심과 사랑의 부재를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애도를 한다고 죽은 자가 돌아오거나 이별을 물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다. 애도의 시간을 잘 보내면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충분한 애도를 마치면 나와 상관없이 그때 미성숙하고 무지했던 어른들의 행동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때 나는 그 불행의 주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음을 인정하며 내 상처를 보듬을 수 있게 된다. 모든 애도가 그렇듯 이 과정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슬프고 아픈 과정이다. 이 과정이 나의 불행했던 과거를 잘 매듭짓는 시간이 될 수가 있다. 그렇게 나의 과거를 잘 매듭지을 때 나는 감정적으로 중립적이 될 수 있고, 나의 마음이 중립적이 되어야 상대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서투른 타인에 대한 이해나 공감보다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우선순위이다. 그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아프고 서럽고 힘들었던 그 아이를 이제 돌아보고 이해 주고 공감해 주고 화해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