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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Jan 23. 2022

코로나 격리라니...

그것도 한꺼번에 3명이

가끔 뉴스나 지인들이 자가격리로 2주씩 보낸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늘 내심  부러웠다. " 좋겠다. 누가 해주는 밥 삼시세끼 먹으며 방에서 뒹굴거리고.." 사실 몸이 심하게 아프지만 않다면 늘  인생에  한 번쯤 그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늘 눈치 보며 보던 책이나 드라마도 실컷보고 낮잠도 자고.. 얼마나 좋을까? 그랬는데 역시  나는 코로나에 걸려도 그런 호사는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걸려버린 것이다.


오미크론이 극성을 피운다는 말은 들어도 마켓도 잘 다니지 않고 두문불출했는데 그러나 복병은 역시 아이들.( 학교에서 옮겨온 듯하다.)


월요일 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춥고 목이 따끔거리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코로나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축농증이 재발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애드빌을 두 알 삼키고 일찍 누우려는 순간 막내딸이 머리가 아프다면 나에게 파고들었다. 머리를 만져보니 딸도 열이 나는 것이었다. 주말에  만난 사람이라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뿐이고 서로 접촉이 없었던 터라 설마 했다. 감기라도 가족들에게 옮기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딸과 나는 마스크를 끼고 잤다.


그러나 밤새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며 오한과 식은땀을 반복해서 흘리며 정말 뼈마디마디가 다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침도 나지 않고 근육통과 목만 따가워 독감인 줄만 알았다. 그렇게 다음날 기어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집에 딸과 함께 퍼질러졌다. ( 난 왜 이때까지도 코로나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ㅜㅜ) 딸은 미열과 가벼운 두통만 보여 너무 다행이라 여겼다.


이 지역도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온 동네 자가 키트 세트도 다 동이 나버리고 코로나 테스트하는 곳도 예약을 할 수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사실 나는 몸이 너무 아파서 운전을 해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  코로나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운전 부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냥 딸과 둘이 집에서 보냈다.  엄마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니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막내딸은 혼자 남편이 차려놓은 아침과 점심을 챙겨 먹고 혼자 놀면서  오히려 나를 챙겼다. (흑! 그렇게 홀로 방치된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역시 나는 내 뼈가 부서져도 자식을 위해서 헌신을 하는 엄마는 못 되는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서도 딸아이 학교 빠지는 것은 걱정이 되는 거 보니 나는 역시 한국 엄마였다.  코로가 검사가 음성이 나와야 한다는 학교직원에 말에 누워서 계속  코로나 테스트 예약 가능 센터를 찾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코로나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겨우 한자리 남은 곳에 딸아이 이름을 올려놓고  이틀 후 학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밤새 또 고열과 한기를 반복하고 다음날 억지로 기운을 차려 코로나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나오는 것으로 신청했다. 학교에 빨리 보내야 하니까. 그런데... 한 시간 후 뚜둥! Positive라는 문자를 받았다. 딸이 Positive라면 나도 100%였다. 그때부터 내가 보인 증상들이 오미크론과 딱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검사에서 나도 확진을 받았다.)


그때부터 갑자기  정신이 없어졌다. 자가진단키트도 구하지 못했는데 남은 가족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남편이 제일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가족 중에 아무도 나처럼 발열이나 증상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나와 딸은 아이들 방에 아들과 남편은 안방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겨우 큰딸의 지인을 통해 구한 자가 키트로 남편과 큰 딸은 음성임을 확인했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와의 격리는 절대로 편할 수가 없었다. 딸은 그나마 있던 미열도 사라져 기력이 회복되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눕고만 싶고, 자고만 싶은데 딸은 심심하다고 하고 좀 지나면 배고프다고 하며 보채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세아이중에 가장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를 방에 가두어 놓으니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잠시 앉아 보드게임이라도 하고 블록놀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아이의 밥을 챙겨야 했다.


한국처럼 배달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편이 혼자  출근하면서 내 아침과 점심을 부탁할 수 없었다. 우린 그냥 암묵적으로 알아서 챙겨 먹자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이 몸으로 부엌을 오래 쓸 수도 없어 딸아이와 컵라면과 냉동식품으로 때우게 되었다. 이럴 때 이민자인 것이 참 서글펐다. 한국이었다면 배달로 뭐든 잘 챙겨 먹었을 테니까..


그렇게 보내고 하루 뒤 아들마저 확진이 된 것을 알고 나는 작은 방에서 아이 셋과 격리 아닌 독박 육아가 시작되었다. 이건  그냥 집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육아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가족 모두가 확진자가 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코로나 격리는 남은 가족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큰딸과 남편은 알아서 식사를 해야 했다.  알아서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왁자지껄 서로  장난치며 웃는 게 일상이었던 식탁에서 각자 조용히 혼자 밥 먹는 건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 Tv를 봐도 밥을 먹어도 서로 착 달라붙어 질척거리는 게 우리 집 문화였는데 혼자 자고 혼자 밥 먹던 남편은 5일째 되는 오늘은 정말 이러고는 못살겠다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에 아직은 며칠 더  작은 방에 셋이서 옹기종기 자야 하는 내가 좀 덜 억울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에 걸릴 수도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이제 때가 왔다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안 아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위험하게 아프지도 않게 적절히  이만하면 잘 넘어갔다. 어린아이들이 크게 고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냥 감사가 절로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순간도 분명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함께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고생은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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