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 therapist Jan 22. 2022

사랑한다는 말...

"엄마에게서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들었다. 나쁜 소식은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행운을 빈다. 그리고 사랑한다."


친정 엄마에게서 이번 주에 나와 아이들이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과 내가  잘하면 좋은 인연이 닿아 책을 출간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의 문자이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일 년에 한두 번 아버지의 문자를 받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화가 난다. 이 문장 어디에서도 손자들을 향한 걱정이나 아이들 데리고 미국에서 홀로 코로나를 겪어낸 딸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나 염려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동네 아는 처자가 불행을 만났을 때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가 할만한 격려의 말이다. 그런데 문자의 마지막이 사랑한다이다. 이 당최 일관성 없는 아빠의 문자를 볼 때마다 나의 아픈 상처에 다시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 아프고 화가 난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자에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정말 너무 싫다.  


사랑한다고? 나를? 정말? 아버지 인생에서 한 번도 일 순위가 되어본 적 없는 나를 사랑한다는 그에 말에 화가 나고 따져 묻고 싶을 때가 많다.  내가 믿는 사랑은  인생에 한 순간이라도 상대를 위해 일순위를 내어주는 것이다. 365일 24시간 모든 순간 일 순위는 못되더라도 인생에서 단 한순간 만이라도 다른 것 모든 것 다 제쳐두고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그런 사랑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러니 도무지 언제 나를 사랑했냐고?  사랑을 그렇게 갈구할 땐 그렇게 매몰차고 냉정하더니 이제 다 커서 아버지에게 사랑도 인정도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는 다 커버린 딸에게 갑자기 사랑한다니... 아버지가 말한 그 사랑은 어떤 모양인지 따져 묻고 싶다. 아니 그렇게 따져 물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때마다 아버지는 이제 관심을 보여줘도 난리라며 다시 연락을 끊고 회피로 일관하셨다. 그렇게 반복된 일들로 보낸 세월이 20년이다.  그 세월에 나의 상처도 무뎌질 만한데도 아직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그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사랑에 대한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다거나 관심을 받는다고 느낀 경험이 매우 드물다. (없다라고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그래도 오빠보다 간섭이 적었고 그나마 나에게 관대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아버지가 간절히 필요할 때  아버지는 돈이나 할머니를 선택했고 그때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아버지에게 대학 보내주고 유학 보내주고 한 지원이 아버지는 분명 사랑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몰라주는 딸이 아버지는 오히려 괘씸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할 수 없다. 원래 사랑이란 게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힘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주고 싶은 사랑만 주는 것은 때론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성숙한 사랑은 받는 쪽도 주는 쪽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관계에서 한쪽은 사랑이라 하고 상대방은 집착이고 욕심이라 한다. 따라서 이걸 정확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내가 상대를 위해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은 상대를 향한 진중하고 무거운 선택이고 책임이다. 그래서 절대로  가벼울 수 없는 말이다. 그런 말을 이렇게 너무나 가볍게 듣고 싶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뭐든 해봐야 아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