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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렇게 사소한 일을 기억할까?.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잊히지 않는 이유

by 원정미

트라우마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트라우마가 되어 힘들다.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한마디로 상처가 되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는 말이다. 물론 정말 생명에 위협을 주고 죽다 살아난 경험은 뇌에 흔적을 남긴다. 비슷한 상황만 되어도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을 하고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생존과 연결되지 않는 일도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무시하는 말, 직장상사의 갑질, 부모의 냉정한 말투나 무관심, 친구들의 놀림 등등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었던 것들인데 그 당시에 크게 상처로 남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면 스스로를 또 자책하기도 한다. " 별것 아닌 것으로 왜 이렇까? 누구나 이런 일을 겪는 거잖아. 근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이런 마음이 들어서 더 우울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때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잊히고 만 기억에 더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관계 얽히고 꼬이는 경우가 많다. 큰 사건사고로 인한 빅 트라우마가 아닌데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당시 개인이 너무나 " 무기력하고 힘없는 존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어린 시절의 학대나 무관심, 방치가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부모 앞에서 어린아이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존재이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맞서거나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모의 작은 말과 행동은 그 누구보다 더 아이들에게 훨씬 더 큰 파워와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어린 시절 미술학원을 보내달라던 나의 부탁을 일언지하 거절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오래도록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그때 어떻게 거절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이다. 아버지는 부모라면 의례 할 법한 거절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녀가 부탁하는 모든 일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고작(?) 그 일로 수십 년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신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무거운 분위기, 아버지의 표정 그리고 말투까지도 여전히 기억난다. 그건 내가 그 당시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대꾸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왜 안되냐고, 오빠는 학원 보내주면서 나는 왜 안 되냐?'라고 따지면서 떼라도 썼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 딸이란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 집에서 무가치하다 느꼈다. 때문에 아버지의 거절이 나에게 오랜 상처로 남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아버지에게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학원을 보내달라고 설득하던지 다른 방법을 간구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 용돈을 깎고 학원을 보내달라고 하던지 아니면 내가 용돈을 모아서 가는 방법을 택했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건강하고 마음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30여 년 전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맞짱을 뜰만큼 마음이 건강하거나 베짱이 두둑하지 못하다. 때문에 어른들이 먼저 그 마음을 보살펴주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숙한 어른의 모습인 것이다.


치유의 시작은 그때 무기력했거나 연약했던 아이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에게 날아오는 작은 돌덩이나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나 실력이 없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이 되어야 나는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생기고 어른으로서 스스를 더 건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가겠다는 다짐과 행동이 따라오게 된다.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운 것은, 과거 이유 없이 돌을 던지고 화살을 날린 상대를 원망하고 분노하며 그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려고 애를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다. 보통의 많은 가해자들은 자신이 돌을 던졌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것이 가족 간의 상처이다. 사과를 받아내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여전히 자신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같다. 가해자를 찾아서 탓하고 원망하는 대신 더 이상 그런 작은 돌덩이에 아파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단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어쩌면 상처 준 사람에 대한 가장 멋있는 복수이다. " 나는 더 이상 그때 그 어린아이가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때 회복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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